예레미야 풀어 읽기 · 47장

이 장의 자리 · 46–52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여호와야훼의 칼은 언제 잠잠해지는가?

전쟁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흔히 어느 쪽이 이길 것인지를 묻습니다. 군대의 규모와 무기, 동맹국의 지원과 방어 능력을 살핍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47장은 전혀 다른 질문으로 끝납니다.

「아, 여호와야훼의 칼아, 언제까지 잠잠하지 않겠느냐?」

이것은 승리를 구하는 외침이 아닙니다. 전쟁이 멈추기를 바라는 외침입니다.

칼을 멈추게 해 달라는 간절한 호소와,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님의 심판이 서로 마주합니다.

읽는 시간 14분소단락 747장 본문 읽기 →

이집트가 가자를 치기 전에 — 누구의 공격을 말하는가?

예레미야 47:1 본문 →

파라오가 가자를 공격하기 전에, 블레셋 사람들에 관해 여호와야훼께로부터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말이 왔습니다.예레미야 47:1 · 두루새김

예레미야 46장이 이집트에 관한 말이었다면, 47장은 블레셋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블레셋은 지중해 동쪽 해안을 따라 자리 잡은 도시 국가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여호수아 13:3과 사무엘상 6:17에는 가자, 아스돗, 아스클론, 가드, 에크론이라는 다섯 주요 도시가 등장합니다.

이집트에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방향으로 올라가는 해안 교통로가 지나갔습니다. 따라서 블레셋 도시들은 단지 유다와 오랫동안 갈등했던 이웃이 아니라, 강대국들이 서아시아를 장악하려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거점이었습니다.

「파라오가 가자를 공격하기 전에」라는 말은 있지만, 어느 파라오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앞 장에는 파라오 느고가 등장합니다(46:2). 그러므로 여기서도 느고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47장 자체는 왕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며, 공격이 일어난 정확한 연대도 확정할 수 없습니다.

2절은 북쪽에서 밀려오는 거대한 물을 보여 줍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북쪽은 바벨론의 침략과 반복해서 연결됩니다(1:14–15; 6:22–23). 따라서 본문의 공격 세력을 바벨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벨론 연대기(BM 21946, 앞면 18–20행)는 느부카드레차르가 기원전 604년 아스클론을 점령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으며,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고 기록합니다. 다만 이 사건이 47장의 모든 장면과 정확히 어떻게 대응하는지, 특히 1절에 나오는 파라오의 가자 공격과 시간상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예레미야는 침략자의 왕과 군대를 자세히 소개하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공격하는가보다 그 공격을 맞이한 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입니다.

북쪽에서 올라오는 물 — 전쟁이 홍수가 되다

예레미야 47:2–3 본문 →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북쪽에서 물이 불어나 넘쳐흐르는 강물이 될 것이다. 땅과 그 안의 모든 것, 성읍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휩쓸 것이다. 사람들이 부르짖고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울부짖을 것이다.」예레미야 47:2 · 두루새김

예언은 군인의 모습이 아니라 물의 움직임으로 시작됩니다.

이 비유의 힘은 물이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성벽을 세우고 군대를 배치할 수는 있어도,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거대한 홍수 앞에서는 방어선이 소용없어집니다. 재앙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퍼지는 것이 아니라, 온 땅을 한꺼번에 집어삼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앞 장에서 이집트는 스스로 나일강처럼 불어나 땅을 덮겠다고 선언했습니다(46:8). 이번 장에서는 북쪽에서 불어난 물이 블레셋을 휩씁니다. 두 본문에서 물은 군대의 위세와 파괴를 나타내지만, 47장의 블레셋은 그 물을 일으키는 쪽이 아니라 휩쓸리는 쪽입니다.

처음에는 땅 전체가 등장합니다. 그다음에는 성읍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어지는 3절에서는 한 가족에게 시선이 멈춥니다.

「적의 힘센 말들이 발굽을 구르는 소리, 전차가 달리고 바퀴가 요란하게 구르는 소리에 아버지들은 손에 힘이 풀려 자녀들을 돌아보지도 않는다.」예레미야 47:3 · 두루새김

침략군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기 전에 그 소리가 들려옵니다. 적이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이미 두려움에 압도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소리가 이끄는 마지막 장면은 뜻밖에도 군인이 아니라 아버지들입니다.

왜 아버지들이 자녀들을 돌아보지도 않는가?

여기서 아버지들이 자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극심한 공포가 사람의 행동 능력 자체를 마비시키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돌아보는 것은 특별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 아닙니다. 평소라면 거의 본능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전쟁의 공포는 그 행동마저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예레미야는 한 나라의 패배를 보여 주기 위해, 자녀를 돌아볼 힘조차 잃은 아버지를 보여 줍니다.

이 장면은 심판의 피해가 군사 시설이나 정치 지도자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나라 전체가 무너질 때 가장 깊은 상처는 일상적인 인간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두 손이 약해지거나 힘을 잃는 표현은 두려움과 무기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6:24에서도 적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경험을 합니다.

갑돌의 남은 자들 — 누구도 홀로 무너지지 않는다

예레미야 47:4 본문 →

「블레셋을 모두 멸망시키고, 두로와 시돈을 돕는 남은 사람들까지 모두 없앨 날이 오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께서 블레셋 사람들, 곧 갑돌 해안의 남은 백성을 멸망시키실 것이다.」예레미야 47:4 · 두루새김

그런데 갑자기 두로와 시돈이라는 두 도시가 등장합니다.

두로와 시돈은 블레셋의 다섯 주요 도시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지중해 해안의 북쪽에 자리한 페니키아 도시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블레셋의 심판에 관한 예언에서 이들의 이름이 등장할까요?

하나님은 두로와 시돈이 블레셋을 돕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두로와 시돈을 돕는 남은 사람들」까지 모두 없애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관계가 구체적으로 군사 동맹이었는지, 정치적 협력이었는지, 또는 여러 형태의 지원 관계를 포함하는지는 본문에 밝혀지지 않습니다. 블레셋이 무너지면 다른 나라들도 의지할 수 있었던 지원 세력 일부를 잃습니다.

한 나라의 멸망이 다른 나라의 안전까지 흔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7:3에서는 에돔, 모압, 암몬과 함께 두로와 시돈이 국제 정세 속의 국가들로 언급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가 강대국의 압력 아래 얽혀 있는 현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갑돌은 블레셋 사람들의 기원과 관련된 지명입니다. 신명기 2:23과 아모스 9:7에서도 블레셋과 갑돌이 연결됩니다.

갑돌의 정확한 지리적 범위에 관해서는 의견이 나뉘지만, 일반적으로 크레타를 비롯한 에게해 방면과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예레미야 47장은 이 지명을 통해 블레셋의 오래된 출신 배경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로와 시돈을 돕는 남은 사람들」도, 「갑돌 해안의 남은 백성」도 심판의 범위 안에 들어갑니다. 평소에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미래의 희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절에서 남은 사람들은 아직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한 차례 재앙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다음 재앙으로부터의 안전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가자의 머리와 아스클론의 침묵 — 멸망을 애도하는 도시들

예레미야 47:5 본문 →

「가자는 머리를 밀었고 아스클론은 멸망했다. 그 골짜기에 남은 사람들아, 언제까지 너희 몸에 상처를 내려느냐?」예레미야 47:5 · 두루새김

앞에서는 물이 밀려왔고 전차 소리가 울렸습니다. 이제 도시들이 등장하지만, 그 모습은 군사적이지 않습니다.

도시의 패배가 애도하는 사람의 몸으로 표현됩니다.

가자는 왜 머리를 밀었는가?

고대 근동에서 머리카락을 깎거나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는 죽음과 재앙을 슬퍼하는 애도 관습으로 나타납니다. 예레미야 16:6에서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며 몸을 베거나 머리를 미는 행위가 언급됩니다. 예레미야 41:5에서도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을 벤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가자는 머리를 밀었고」라는 말은 도시 전체를 애도하는 사람처럼 묘사한 것입니다. 이런 의인화는 도시의 멸망을 단순한 건물의 파괴와 구별합니다. 성벽과 집이 무너지는 일은 그곳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이 무너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스클론은 멸망했는가, 침묵했는가?

3절에서는 말발굽과 전차 바퀴가 요란하게 울렸습니다. 5절에 이르러서는 아스클론이 무너지고, 그곳의 삶이 멎습니다.

이 차이는 뒤에 등장할 칼의 침묵 문제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람들의 도시에서는 삶의 소리가 사라지는데, 파괴하는 칼에게는 아직 멈춤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 골짜기에 남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내며 애도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을 단순히 다른 신을 섬기는 이들의 애도 풍습에 대한 꾸지람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몸에 상처를 내는 행위 자체가 다른 율법 본문에서 금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신명기 14:1), 여기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정서는 끝나지 않는 애도에 대한 탄식입니다.

더구나 바로 다음 절에서도 「언제까지」라는 질문이 반복됩니다.

5절에서는 사람들이 언제까지 몸에 상처를 낼 것인지 묻습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의 칼이 언제까지 잠잠하지 않을 것인지 묻습니다. 사람들의 애도가 끝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을 상하게 하는 칼이 아직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여기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몸에서 그 고통을 일으키는 칼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멸망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드메타는 그침이나 파멸을 나타내는 동사 형태입니다. 문맥상 도시가 파괴되었다는 뜻이지만, 원문에서는 소리가 그치고 활동이 중단되는 듯한 이미지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그들의 골짜기에 남은 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앞의 아스클론에 이어지는 말인지, 뒤에 나오는 질문의 대상인지를 문법적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한편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아낙 사람들의 남은 자들」로 읽습니다. 여호수아 11:22는 가자와 가드, 아스돗에 아낙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하므로, 이 읽기는 블레셋 지역에 관한 오래된 전승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 전통 가운데 어느 것이 원래의 표현을 보존하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두루새김은 마소라 본문의 표현을 따라 「그 골짜기에 남은 사람들아」로 옮겨, 남은 사람들을 향한 부름으로 읽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칼아, … 쉬어라」 — 심판을 전하면서도 탄식하는 목소리

예레미야 47:6 본문 →

지금까지 여호와야훼는 블레셋의 멸망을 선언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야훼의 칼을 향해 멈추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등장합니다.

아, 여호와야훼의 칼아, 언제까지 잠잠하지 않겠느냐? 네 칼집으로 들어가라. 쉬어라. 조용히 있어라.예레미야 47:6 · 두루새김

본문은 이 목소리의 주인을 밝히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자신의 탄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고통을 대신 말하는 목소리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시 전체가 사용하는 극적인 대화 형식 속에서 등장하는 이름 없는 화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본문 안에, 그 심판이 멈추기를 바라는 목소리도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단순히 미래의 재앙을 기계적으로 전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 말씀이 현실이 될 때 사람들이 겪는 두려움과 슬픔을 자신의 언어 안에 담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이 긴장은 낯설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를 고발하면서도 백성의 상처 때문에 아파합니다(8:18–9:1).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심판의 현실 앞에서 탄식합니다.

다만 47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여기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유다 백성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오랜 적대 세력이었습니다. 사사기와 사무엘상에 걸쳐 두 민족 사이에는 많은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적이 심판받는 장면을 그리면서도 예언은 승리의 환호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칼에게 쉬라고 호소합니다.

세 차례의 멈춤 요청

칼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공격을 중단하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쉬는 것은 그 행동을 멈춘 뒤의 상태입니다. 조용히 있는 것은 더 이상 움직이거나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고요함입니다.

전쟁 자체가 끝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간절한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네가 어떻게 잠잠하겠느냐?」 — 마지막 대답의 무게

예레미야 47:7 본문 →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 네게 명령하셨는데, 네가 어떻게 잠잠하겠느냐? 그분께서 아스클론과 바닷가를 네가 공격할 곳으로 정하셨다.예레미야 47:7 · 두루새김

앞의 질문이 칼의 움직임이 언제 끝나는가를 물었다면, 뒤의 질문은 칼이 지금 멈추는 것이 가능한가를 묻습니다.

본문은 칼을 여호와야훼의 심판을 실행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 속 모든 군사적 침략이나 폭력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해도 된다는 일반 원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예언은 블레셋과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 관해 주어진 구체적인 선언입니다.

왜 블레셋이 이처럼 심판받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죄목도 이 장에서는 나열하지 않습니다. 아모스 1:6–8은 가자의 주민들을 사로잡아 에돔에 넘긴 행위를 고발하고, 에스겔 25:15–17은 블레셋의 오랜 적대와 복수심을 지적합니다. 이 본문들은 블레셋에 대한 다른 예언적 고발을 보여 주지만, 그 내용을 모두 47장의 숨은 이유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47장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심판의 원인보다 그 심판을 실행하는 권위와 멈출 수 없는 진행입니다.

블레셋에 대한 심판을 성경 전체에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아모스 1:6–8은 가자와 아스클론을 포함한 블레셋 도시들에 심판을 선포합니다. 스바냐 2:4–7 역시 가자와 아스클론의 황폐함을 말합니다. 두 본문은 블레셋이 여호와야훼의 심판 아래 있다는 점에서 예레미야 47장과 만납니다.

그러나 스바냐 2장에는 또 하나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블레셋의 해안 지역이 훗날 유다의 남은 사람들이 거주할 곳으로 묘사됩니다(2:7).

이와 달리 예레미야 47장은 블레셋 땅의 이후 회복이나 새로운 거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시선은 파괴와 애도, 그리고 그 심판을 실행하는 칼에 머뭅니다.

예레미야 25:29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읍에 재앙을 내리기 시작하셨는데, 다른 민족들이 어떻게 벌을 면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47장은 바로 그 원칙이 블레셋에게 적용되는 한 사례입니다.

유다를 심판하신 여호와야훼는 블레셋도 심판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오랫동안 싸웠다는 사실만으로 블레셋이 심판받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호와야훼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주권은 이스라엘의 경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믿는 것과 다른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심판에 관한 성경의 언어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 언어를 사용하여 오늘날 특정 민족이나 주민들의 고통을 정당화할 권한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고대 블레셋에 관한 예언을 현대 가자 주민들에게 직접 적용하는 것은 본문이 허락하는 해석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인 히브리어에는 칼을 직접 부르는 2인칭 표현과 그 칼을 가리키는 3인칭 표현이 함께 나타납니다. 두루새김은 이 절에서도 칼을 「네게」, 「네가」라고 직접 부르는 말로 옮겼습니다. 그러므로 7절을 칼 자신의 대답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칼에게 쉬라고 호소하던 사람이 스스로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말일 수도 있고, 다른 목소리가 대답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이 구별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전쟁의 소리에서 칼의 침묵으로

예레미야 47:1–7 본문 →

전쟁의 거대한 소음으로 시작한 예언이 침묵을 청하는 목소리로 끝나려는 순간, 마지막 대답이 들려옵니다. 예레미야 47장은 그 고통을 서둘러 해소하지 않습니다. 쉬라고 부르는 목소리도 지우지 않고, 아직 쉴 수 없다는 대답도 거두지 않습니다.

이 장에는 칼이 칼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없습니다.

칼은 여전히 아스클론과 바닷가를 향해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것은 단순한 적군의 진영이 아니라 도시들이고, 집들이고, 자녀를 돌아볼 힘조차 잃은 아버지들이며, 몸에 상처를 내며 애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칼은 언제 잠잠해질 것입니까?

본문은 그날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마지막까지 칼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 칼이 향하는 바닷가에서, 이미 멸망한 아스클론의 이름을 다시 들려줍니다.

그곳에서 한 목소리는 여전히 쉬라고 말하고, 다른 목소리는 아직 쉴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