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48장
이 장의 자리 · 46–52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깨진 그릇을 위해 우시는 하나님
모압이 무너집니다. 성읍들이 함락되고, 젊은이들이 죽임을 당하며,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달아납니다. 그들이 믿었던 신 그모스도 포로로 끌려갑니다. 하나님은 모압의 교만을 고발하시고, 그 나라를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릇처럼 깨뜨리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 긴 심판의 한가운데서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압 때문에 울부짖고, 모압 전체를 위해 소리치겠다.」
누가 이렇게 울고 있습니까?
이 장의 핵심은 모압이 얼마나 철저히 무너지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토록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왜 모압을 위해 우시며, 왜 다시 회복을 약속하시는가에 있습니다.
지도가 무너지기 시작하다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시작하는 심판
모압에 관해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느보가 재앙을 당했다! 느보가 짓밟혔다. 기랴다임은 수치를 당하고 점령되었다. 미스갑은 수치를 당하고 무너졌다.」예레미야 48:1 · 두루새김
느보, 기랴다임, 미스갑, 헤스본, 맛멘, 호로나임, 루힛. 뒤로 가면 디본, 아로엘, 야하스, 벧므온, 그리욧, 보스라를 비롯한 더 많은 지명이 등장합니다.
오늘날 독자에게 이 이름들은 낯섭니다. 그러나 당시 모압 사람들에게 이 이름들은 자신들의 집과 밭, 시장과 신전이 있는 실제 장소였습니다.
모압은 사해 동쪽의 고원 지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왕국이었습니다. 북쪽의 헤스본 일대에서 남쪽의 아르논강 너머까지 이어지는 여러 지역을 두고 이스라엘과 오랫동안 충돌했습니다. 국경과 도시들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습니다(민수기 21:21–30; 32:34–38; 열왕기하 3:4–27).
이 땅의 역사를 보여 주는 특별한 고대 기록이 있습니다. 모압 왕 메사가 남긴 비문입니다. 이 비문에는 메사가 이스라엘의 지배에서 벗어나 여러 지역을 되찾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본과 느보를 비롯한 지명들, 그리고 모압의 신 그모스가 등장합니다.
메사는 자신이 전쟁에서 거둔 성공을 그모스의 도움으로 설명합니다. 비문의 내용은 모압 왕의 관점에서 작성되었으므로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모두 객관적으로 알려 주는 기록은 아니지만, 모압이 자신의 정치적 힘과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8장은 바로 그런 성읍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파괴를 선언합니다.
한때 왕들이 되찾았다고 자랑하고, 요새를 세우고, 신들에게 영광을 돌렸던 땅이 이제 함락되는 땅이 됩니다. 각 지역의 이름을 이어 부르면서 모압이라는 나라 전체가 무너지는 광경을 만들어 냅니다.
헤스본에서 벌어지는 이름의 반전
「모압의 명성은 더는 없다. 헤스본에서는 사람들이 모압을 해칠 계획을 세운다. 『자, 모압을 없애 버려 나라로 남지 못하게 하자.』 맛멘아, 너도 잠잠해질 것이다. 칼이 네 뒤를 쫓을 것이다.」예레미야 48:2 · 두루새김
히브리어로 헤스본은 헤슈본(חֶשְׁבּוֹן), 「계획을 세운다」에 해당하는 말은 하슈부(חָשַׁב)입니다. 두 단어의 소리가 비슷합니다. 이어 맛멘에는 「잠잠해질 것이다」라는 말이 선포됩니다. 여기에도 지명과 침묵을 나타내는 말 사이의 소리 유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성읍들의 이름을 단순한 지리 정보가 아니라 심판을 알리는 말로 바꿉니다.
오르막으로 올라가도, 내리막으로 내려가도
3–5절에서는 도시들의 멸망이 사람들의 울음으로 바뀝니다.
「모압이 무너졌다. 그 어린아이들이 비명을 지른다.」예레미야 48:4 · 두루새김
「사람들은 루힛 오르막을 오르며 울고 또 운다. 호로나임 내리막에서는 멸망을 슬퍼하는 고통스러운 외침이 들린다.」예레미야 48:5 · 두루새김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모압의 길 전체가 피난길이 된 듯합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움직이지만, 가는 곳마다 재앙의 소식을 듣습니다. 어린아이들의 비명까지 언급되면서, 파괴가 군인이나 통치자에게만 닥치는 일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모압이라는 나라가 무너지는 일은 그 안에서 자라던 아이들의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믿었기에 이렇게 되었는가?
7절에서 처음으로 심판의 이유가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모압아, 네가 이룬 일과 네 보물을 믿었으므로 너도 붙잡힐 것이다. 그모스도 제사장들과 관리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예레미야 48:7 · 두루새김
모압은 「네가 이룬 일과 네 보물」을 삶의 마지막 보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 그모스도 모압의 안전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모스마저 포로로 끌려갑니다.
당시 국가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과 국가의 운명을 긴밀하게 연결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자기 신의 능력이 드러났다고 생각했고, 패배하면 신이 자신들을 버렸거나 상대편 신이 더 강하다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던 존재가 자신들과 똑같이 구출되어야 할 처지에 놓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10절은 읽기 어려운 선언을 덧붙입니다.
「여호와야훼의 일을 건성으로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자기 칼로 피 흘리기를 꺼리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다.」예레미야 48:10 · 두루새김
이 구절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으로 바꾸어 읽으면 본문의 의미가 흐려집니다. 두 문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의 일」은 모압을 심판하는 전쟁을 벌이는 일을 가리킵니다. 침략군이 그 심판을 끝까지 수행하지 않는 일을 저주하는 강렬한 전쟁 예언의 언어입니다.
이러한 선언은 현대의 개인이나 국가가 자신들의 폭력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할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예언이지, 독자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한을 부여하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은 포도주 — 평안이 어떻게 교만이 되는가
「모압은 젊을 때부터 평안했다. 가라앉은 찌꺼기 위에 그대로 놓여 있는 포도주처럼 조용히 지냈다.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겨 부어진 적이 없고 포로로 끌려간 적도 없다. 그래서 그 맛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 향도 바뀌지 않았다.」예레미야 48:11 · 두루새김
포도주를 만들어 두면 찌꺼기가 바닥에 가라앉습니다. 맑은 포도주를 다른 그릇으로 옮겨 담으면 찌꺼기와 분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같은 그릇에 두면 포도주는 그 찌꺼기 위에 머무릅니다.
모압은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려 왔습니다. 다른 나라에 의해 완전히 흩어지는 포로 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를, 한 그릇에서 다른 그릇으로 옮겨지지 않은 포도주에 비유합니다. 물론 이 표현을 모압이 역사상 전쟁이나 침략을 전혀 겪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하 3장만 보아도 모압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여기서 「그 맛이 그대로 남아 있고 그 향도 바뀌지 않았다」는 말은 반드시 좋은 품질을 유지했다는 칭찬이 아닙니다. 문맥상 모압의 성향이 변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의 힘을 믿었고, 자신들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의심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모압은 평안을 누렸지만, 그 평안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지는 않았습니다.
고난만이 사람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는 삶도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자신이 유지해 온 방식이 언제나 옳았다고 착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평안 자체를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평안을 자신이 만든 절대적인 안전으로 여기며 교만해진 태도입니다. 그 점은 뒤의 26절과 29–30절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릇을 기울이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보아라, 그날이 온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모압에게 그릇을 기울여 붓는 자들을 보내겠다. 그들이 모압을 쏟아 버리고, 그 그릇들을 비우며 항아리들을 깨뜨릴 것이다.」예레미야 48:12 · 두루새김
모압에게 닥치는 침략과 포로 생활은 바로 이 강제적인 변화로 표현됩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안정의 틀 자체를 뒤엎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모스와 벧엘 — 모압과 이스라엘을 함께 비추는 거울
「이스라엘 집안이 믿고 의지하던 벧엘 때문에 수치를 당했듯이, 모압도 그모스 때문에 수치를 당할 것이다.」예레미야 48:13 · 두루새김
벧엘은 북이스라엘의 중요한 예배 중심지였습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세우고 백성들이 그곳에서 예배하도록 했습니다(열왕기상 12:28–33). 호세아 10:5–6에서는 북이스라엘이 의지하던 종교적 대상이 결국 수치의 원인이 되는 장면이 예고됩니다.
모압은 이방 민족이므로 수치를 당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안전하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나라 모두 자신들이 종교를 통해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의지하던 것 때문에 수치를 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이름이 하나님을 대신할 다른 안전장치를 만들어도 좋다는 허락은 아닙니다.
이 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다른 민족의 종교만을 향하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의 잘못된 신앙도 같은 기준 아래 놓습니다. 모압에 대한 예언을 듣는 유다 사람들은 이 말을 남의 이야기로만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러진 지팡이와 길가에 선 사람들
14절에서 모압은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우리는 용사들이다. 전쟁에 능한 힘센 사람들이다』라고 말할 수 있느냐?」예레미야 48:14 · 두루새김
이 선언은 뒤에 이어지는 장면들과 날카롭게 대조됩니다. 15절에서는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이 죽임당하러 내려가고, 25절에서는 모압의 뿔이 잘리고 팔이 부러집니다.
지팡이가 부러졌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압 주변의 모든 사람아, 그 이름을 아는 모든 사람아, 모압을 위해 슬퍼해라. 이렇게 말해라. 『어쩌다 그 강한 막대기가, 그 영광스러운 지팡이가 부러졌는가!』」예레미야 48:17 · 두루새김
막대기와 지팡이는 힘과 통치권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모압은 주변 나라들이 그 힘을 알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모압의 심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롱만으로 이루어진 노래가 아닙니다. 이미 여기서 슬퍼하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디본은 높이에서 내려와 앉는다
「디본에 사는 딸아,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내려와 목마른 채 앉아라. 모압을 약탈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와 네 요새들을 파괴했다.」예레미야 48:18 · 두루새김
디본은 앞에서 언급한 메사 비문이 발견된 지역이며, 모압 왕국의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위세를 누리던 도시가 굴욕적인 처지에 놓이는 장면입니다. 풍요와 권력을 누리던 도시가 이제 가장 기본적인 물조차 필요로 하는 사람처럼 묘사됩니다.
모압의 몰락이 정치적 수치만이 아니라 생존의 위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로엘 주민아, 길가에 서서 지켜보아라. 도망치는 남자와 빠져나오는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라고 물어라.」예레미야 48:19 · 두루새김
그들의 모습만 보아도 재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이 그 대답처럼 이어집니다.
「모압이 무너져 수치를 당했다. 울부짖고 소리쳐라. 모압이 짓밟혔다고 아르논에 알려라.」예레미야 48:20 · 두루새김
이렇게 예언은 성읍에서 성읍으로 전달되는 재앙의 소식이 됩니다.
21–24절에 도시의 이름들이 길게 나오는 것도 같은 효과를 만듭니다. 독자는 마치 모압의 지도를 펼쳐 놓고,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심판의 소식이 번져 가는 것을 보는 듯합니다.
뿔과 팔이 부러지다
「모압의 뿔이 잘리고 그 팔이 부러졌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48:25 · 두루새김
뿔은 짐승의 힘과 위세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시편 75:10에서도 뿔은 강한 자의 권세를 나타냅니다. 팔 역시 힘을 행사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뿔이 잘렸다는 것은 권세를 잃었다는 말입니다. 팔이 부러졌다는 것은 그 권세를 행사할 능력조차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힘이 왜 그렇게 무너져야 합니까?
이어지는 단락에서 예언은 모압의 내면으로 들어갑니다.
남을 비웃던 나라가 웃음거리가 되다
「모압을 취하게 하여라. 모압이 여호와야훼를 거슬러 자신을 높였기 때문이다. 모압은 자기가 토한 것 속에서 뒹굴며, 그 자신도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예레미야 48:26 · 두루새김
앞에서는 오랫동안 안전하게 보관된 포도주였는데, 여기서는 취하여 「자기가 토한 것 속에서 뒹굴」며 웃음거리가 되는 사람입니다. 교만은 인간에게 자신을 크게 보이게 하지만, 심판의 장면에서는 자신을 통제할 능력조차 잃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을 비웃었던 모압
「모압아, 너는 이스라엘을 웃음거리로 삼지 않았느냐? 이스라엘이 도둑들과 함께 붙잡히기라도 했느냐? 너는 이스라엘을 말할 때마다 몸을 흔들며 비웃었다.」예레미야 48:27 · 두루새김
「이스라엘이 도둑들과 함께 붙잡히기라도 했느냐?」라는 질문은 모압의 조롱에 어떤 정당한 근거가 있었느냐고 묻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을 저질러 현장에서 잡힌 도둑처럼 취급받을 이유가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에게 아무런 죄도 없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서 전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심각하게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모압이 이웃의 고난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았는가입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재난을 통해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확인하려 했습니다. 이웃이 낮아졌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이 높다는 증거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압도 웃음거리가 됩니다.
예언이 드러내는 것은 모압이 사용했던 판단 기준의 위험입니다. 다른 사람의 무너짐을 자신의 높음을 확인하는 근거로 삼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가 바뀌었을 때 그 기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교만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이유
우리는 모압이 얼마나 교만한지 들었습니다. 모압은 몹시 교만합니다. 우리는 그 거만함과 교만과 오만, 스스로 높이는 마음에 관해 들었습니다.예레미야 48:29 · 두루새김
히브리어 본문에서도 높아짐과 거만함을 나타내는 낱말들이 겹쳐 나옵니다. 모압의 교만은 한두 번 잘못된 판단을 내린 정도가 아닙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결정할 만큼 깊이 뿌리내린 태도였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압의 거만함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되다. 그 큰소리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예레미야 48:30 · 두루새김
여기서 「헛되다」는 표현은 모압의 힘이 실제로 아무것도 없었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모압은 분명한 정치적·군사적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달랐습니다.
그 나라의 자랑은 자신을 구원할 능력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이 이 장 전체에서 가장 뜻밖의 전환을 일으킵니다.
「나는 모압 때문에 울부짖고」 — 심판의 한가운데서 들리는 애가
「그러므로 나는 모압 때문에 울부짖고, 모압 전체를 위해 소리치겠다. 길헤레스 사람들을 위한 신음 소리가 난다.」예레미야 48:31 · 두루새김
앞 절에서 모압의 오만을 드러내던 목소리가 이제 모압 때문에 웁니다.
31절을 이끄는 말은 「그러므로」입니다. 모압이 교만했기 때문에 심판이 정당하다는 설명 뒤에, 그 심판으로 무너지는 모압을 위해 울부짖겠다는 말이 나옵니다.
누가 모압을 위해 우는가?
문맥상 하나님 자신의 탄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언자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슬픔을 대신 전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모압의 교만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나라의 멸망도 기쁨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과 그 잘못 때문에 무너지는 존재의 고통을 슬퍼하는 것은 반드시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포도나무를 위해 우는 목소리
「십마의 포도나무야, 야세르를 위해 울 때보다 더 너를 위해 울겠다. 네 덩굴은 바다를 건너 야세르 바다까지 뻗었다. 그러나 약탈자가 네 여름 과일과 포도 수확을 덮쳤다.」예레미야 48:32 · 두루새김
앞에서는 모압이 그릇 안에 보관된 포도주였습니다. 여기서는 포도주를 만들어 내던 포도나무 자체가 파괴됩니다. 포도주 한 항아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가꾸어 온 포도밭과 수확의 바탕이 사라집니다.
전쟁은 단지 한 시기의 수확물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서 기쁨을 얻으며 살아가던 방식 전체를 파괴합니다.
같은 외침인데, 더는 같은 소리가 아니다
「과수원과 모압 땅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졌다. 내가 포도주 틀에서 포도주가 나오지 못하게 했다. 이제 기쁨의 함성을 지르며 포도를 밟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외치는 소리가 들려도 기쁨의 함성은 아니다.」예레미야 48:33 · 두루새김
모압은 소리를 잃은 것이 아니라, 기뻐할 이유를 잃었습니다.
나라의 멸망은 왕궁과 군대의 몰락만이 아닙니다. 매년 반복되던 수확의 즐거움, 가족과 이웃이 함께 나누던 기쁨도 사라지는 일입니다.
피리처럼 우는 마음
「그러므로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해 피리처럼 울고, 길헤레스 사람들을 위해 피리처럼 운다. 모압이 모아 둔 재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예레미야 48:36 · 두루새김
피리는 슬픔을 표현하는 악기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사야 16:11에는 모압을 향한 마음속 떨림이 악기의 울림에 비유됩니다. 사람이 악기를 불어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너무 깊어 마음이 하나의 악기처럼 울립니다.
이 예언에는 모압을 위해 울고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모두 머리를 밀고 수염을 깎았다. 손마다 상처가 있고 허리에는 자루옷을 둘렀다.」예레미야 48:37 · 두루새김
머리를 밀고 수염을 깎으며, 몸에 상처를 내고 자루옷을 두르는 행위는 고대 근동에서 슬픔을 나타내던 관습과 관련됩니다. 이 본문은 그 행위들을 통하여 모압 전체가 상실과 슬픔에 잠긴 모습을 그립니다.
이제 11절의 그릇 이미지가 돌아옵니다.
「모압의 모든 지붕 위와 광장마다 온통 슬피 우는 소리뿐이다. 내가 모압을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릇처럼 깨뜨렸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48:38 · 두루새김
이 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그 그릇을 깨뜨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서는 그 깨어지는 과정에서 들리는 울음소리가 마음을 울린다고 말합니다.
깨뜨리시는 분의 말씀과, 깨어지는 것을 슬퍼하는 목소리가 같은 예언 안에 놓여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31–36절에서 「나」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본문은 명확하게 나누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근거가 있습니다. 30절에서 여호와야훼가 직접 모압의 거만함을 안다고 말씀하시고, 35절에서도 하나님이 모압에서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을 없애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반면 예언자의 탄식으로 읽을 근거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에게 심판을 선포하면서도 그들의 상처 때문에 깊이 슬퍼하는 인물입니다(예레미야 8:18–9:1). 더구나 여기 나오는 애가의 여러 표현은 이사야 15–16장의 모압 애가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나」라고 말하는 이 부분을 모두 예레미야 개인의 말이라고 확정하거나, 모든 문장을 구별 없이 여호와야훼의 직접 말씀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십마와 야세르는 성경에서 포도 재배와 관련되어 언급되는 지역입니다(이사야 16:8–9). 「야세르 바다」가 정확히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는 불확실합니다. 33절의 원문에서는 같은 표현을 반복하면서 소리의 성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말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도 기쁨의 함성은 아니다」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비둘기가 숨는 바위 위로 독수리가 날아온다
40절에서 장면은 다시 전쟁의 위협으로 돌아갑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적이 독수리처럼 날아와 모압 위로 날개를 펼칠 것이다.」예레미야 48:40 · 두루새김
9절에서는 모압에게 날개를 주라고 했습니다. 모압이 날아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압 주민들아, 성읍들을 버리고 바위틈에 살아라. 깊은 구덩이 입구 가장자리에 둥지를 트는 비둘기처럼 되어라.」예레미야 48:28 · 두루새김
모압은 날아 도망하려는 새가 되고, 침략자는 하늘에서 덮치는 맹금류가 됩니다. 비둘기는 숨을 곳을 찾습니다. 독수리는 먹이를 향해 덮칩니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이 이미지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리욧이 점령되고 요새들이 함락되었다. 그날 모압 용사들의 마음은 아이를 낳으며 고통을 겪는 여자의 마음처럼 될 것이다.」예레미야 48:41 · 두루새김
처음에 모압은 자신을 용사들의 나라라고 자랑했습니다(48:14). 아무리 강한 전사라도 닥쳐오는 고통을 자기 힘으로 다스릴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공포를 피해도 구덩이가 기다린다
「모압 주민아, 네 앞에 공포와 구덩이와 덫이 있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48:43 · 두루새김
「공포를 피해 달아나는 사람은 구덩이에 빠지고, 구덩이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덫에 걸릴 것이다. 내가 모압 백성을 벌할 해가 모압에 닥치게 하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48:44 · 두루새김
하나의 위기를 피했다고 재앙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압은 어느 방향에서도 안전을 얻지 못합니다. 그들이 맞닥뜨린 사건이 여호와야훼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은 독자에게 특정한 재난을 보고 섣불리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판단할 권한을 주지 않습니다. 본문은 모압에 관한 구체적인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예언 문학에서 아이를 낳는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위기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비유입니다(이사야 13:8; 예레미야 6:24). 이 비유의 요점은 여성이 약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43절에는 비슷한 소리의 세 단어가 연달아 놓입니다. 이 장면은 이사야 24:17–18의 표현과 매우 가깝습니다. 두 본문은 공포와 구덩이와 덫이 차례로 이어지는 이미지를 공유합니다.
헤스본의 불과 그모스의 백성 — 옛 승리의 기억이 뒤집히다
「도망치던 사람들이 기운이 다해 헤스본의 그늘에 멈추어 섰다. 그런데 헤스본에서 불이, 시혼 한가운데서 불꽃이 나와 모압의 관자놀이와 소란을 피우는 백성의 정수리를 삼켰다.」예레미야 48:45 · 두루새김
2절에서 헤스본은 모압을 해칠 계획이 세워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늘은 일반적으로 쉼과 보호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모압이 기억하던 역사적 패배의 언어가 현재의 심판을 표현하는 데 다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모스는 끝내 구원하지 못한다
「모압아, 너는 참으로 비참하다! 그모스의 백성이 망했다. 네 아들들이 포로로 붙잡혀 가고 네 딸들도 포로로 끌려갔다.」예레미야 48:46 · 두루새김
7절에서 그모스가 제사장들과 관리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간다고 했습니다. 처음과 끝이 서로 대응합니다. 모압은 그모스를 믿었지만, 그모스는 모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말씀하신 분은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습니다(48:1). 모압의 역사는 그모스의 능력에 맡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모압이라는 민족의 미래를 이어 갈 세대마저 자기 땅에서 사라집니다. 여기서 예언이 끝났다면 이 장은 모압의 철저한 파멸을 선고하는 말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민수기 21:26–30에서 헤스본은 아모리 왕 시혼의 성읍이었습니다. 시혼은 이전에 모압 왕과 싸워 영토를 빼앗은 인물로 등장합니다. 이어지는 옛 노래에는 헤스본에서 불이 나오고 시혼의 성읍에서 불꽃이 나와 모압을 삼키는 이미지가 나타납니다(민수기 21:28). 더욱이 모압의 관자놀이를 치는 이미지는 민수기 24:17의 발람 예언과도 연결됩니다. 민수기 24장에서는 야곱에게서 나오는 통치자가 모압을 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예레미야 48:45는 이 오래된 시적 표현들을 끌어와 모압의 새로운 재앙을 묘사합니다. 따라서 이 절의 「시혼」을 예레미야 시대에 다시 등장한 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시혼은 오래된 전쟁 이야기 속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훗날」 — 모압에게도 주어지는 회복의 약속
「그러나 훗날 내가 모압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여기까지가 모압에 대한 심판의 말씀입니다.예레미야 48:47 · 두루새김
앞에서는 모압이 더는 한 민족으로 남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48:42). 47절은 그 이후에도 하나님이 모압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멸망의 선언이 마지막 말은 아니다
심판이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 뒤에 회복의 가능성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모압이 다시 강한 군대를 조직하기 때문에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모스가 마침내 모압을 구원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모압의 미래는 그들이 절대적으로 의지하던 것들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도 모압의 미래를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여호와야훼입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겠다」는 무엇을 뜻하는가?
두루새김은 앞 절에서 아들들과 딸들이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 이어, 모압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으로 옮겼습니다. 다만 원문의 표현을 단지 모압 사람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다는 의미로만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모압이 처한 전체적인 상황이 달라지는 회복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회복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취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독립 왕국을 다시 세우는 것인지,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의 귀환인지, 더 넓은 민족적 회복인지 세부 내용을 확정할 수 없습니다. 「훗날」이라는 표현을 특정한 역사적 연도나 종말의 일정으로 바꿀 근거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지만 그 약속이 실현되는 방식은 열려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아니라 모압에게 회복을 약속하는가?
하나님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회복의 약속이 오직 그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49:6에서는 암몬 사람들의 형편을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하시고, 49:39에서는 엘람의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더 앞선 예레미야 12:14–17에서는 유다를 해친 이웃 민족들을 뽑아 버리겠다고 하시면서도, 그 후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시 세우실 가능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여호와야훼의 길을 배우고 그분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하나님 백성 가운데 세워질 수 있다는 내용까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고 회복하시는 분이면서, 다른 민족들의 역사도 다루시고 그들에게도 새로운 미래를 허락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창세기 12:3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에는 땅의 모든 가족이 복을 받는다는 전망이 들어 있습니다. 모압 자체도 이스라엘과 완전히 무관한 민족은 아닙니다. 창세기 19:37은 모압의 기원을 롯에게 연결합니다. 룻기에는 모압 여인 룻이 등장하고, 그의 이야기는 다윗의 계보로 이어집니다(룻기 4:13–22).
물론 룻의 이야기를 예레미야 48:47의 직접적인 성취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 배경도 다르고, 두 본문 사이에 직접적인 성취 관계가 명시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의 오랜 적대 관계가 하나님이 모압 사람들에게 베푸실 수 있는 모든 미래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45–47절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압의 포로 생활과 회복의 약속이 이 장의 결말을 이룹니다. 반면 칠십인역의 해당 모압 예언(그리스어 예레미야 31장)에는 히브리어 본문의 45–47절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는 히브리어 본문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결말이 늘어났을 가능성, 또는 그리스어 번역의 바탕이 된 히브리어 본문이 더 짧았을 가능성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어느 본문 형태가 최초의 것인지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깨진 그릇이 아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고, 그 심판으로 무너지는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며, 심판 이후의 미래까지 열어 두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은 심판과 긍휼 가운데 어느 것이 하나님의 참된 성품인가를 선택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두 모습을 함께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이 무너질 때 웃었습니다.
그러나 모압이 무너질 때 예언 속에서는 울음이 들립니다.
예레미야 48장은 잘못을 눈감아 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47절의 회복 약속은 깨진 그릇이 당장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죽은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잃어버린 세월이 어떻게 보상되는지도 이 장은 말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고향을 떠났고, 포도 수확의 기쁨의 함성은 사라졌으며, 모압의 성읍들은 무너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은 그 상처를 마지막 말씀으로 삼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48장은 오랫동안 자기 그릇 안에서 안전하다고 믿었던 나라가 산산이 부서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끝에서, 그 나라는 자신이 믿었던 재물이나 군대나 신이 아니라 자기를 심판하신 하나님의 입에서 새로운 미래에 관한 말을 듣습니다.
그 말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한마디가 들립니다.
「그러나 훗날 내가 모압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