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7–21장 · 무너지는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이 소돔처럼 되었을 때

사사기 19장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이야기의 시작에서 남편을 떠났다가 다시 그와 함께 길을 나섭니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끔찍한 폭력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이 열두 조각으로 나뉘어 이스라엘 온 땅에 보내집니다.

이 이야기의 두려운 점은 악한 사람들이 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다른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점입니다.

사사기 19장은 하나님을 섬겨야 할 공동체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책임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공동체가 안전하거나 의롭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독자 앞에 드러냅니다.

읽는 시간 16분소단락 719장 본문 읽기 →

다정한 말로 데려오려 했던 여자

사사기 19:1–3 본문 →

이야기는 익숙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 무렵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의 외딴 곳에 한 레위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의 베들레헴에서 한 여자를 첩으로 맞아들였습니다.사사기 19:1 · 두루새김

사사기 17장과 18장에서도 반복된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상이나 제사장 제도가 아니라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첩」은 단순히 비밀스러운 연애 관계에 있는 여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가정에서 첩은 남자와 지속적인 혼인 관계를 맺었으나 일반적으로 아내보다 낮은 지위를 가진 여성을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본문도 남자를 그녀의 「남편」이라고 부르고, 그녀의 아버지를 남자의 「장인」이라고 부릅니다(19:3–4).

2절은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그를 배신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녀가 남편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갔고 넉 달 동안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만 이어서 알려 줍니다.

무엇보다 이 첫 장면에서 여자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뒤에 그녀가 당할 폭력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본문도 두 사건을 정당한 처벌 관계로 연결하지 않습니다.

넉 달 뒤 남자는 여자를 데려오려고 찾아갑니다.

남편은 여자를 다정한 말로 달래어 데려오려고 뒤따라갔습니다. 하인 한 명과 나귀 두 마리도 함께 갔습니다. 여자는 남편을 아버지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여자의 아버지는 그를 보고 기뻐하며 맞이했습니다.사사기 19:3 · 두루새김

히브리어의 표현은 레다베르 알 리바, 문자적으로는 ‘그녀의 마음에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상대를 위로하거나 달래어 마음을 돌리려는 말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출발점이 이야기의 끝을 생각하면 가슴 아픈 대조가 됩니다.

처음에는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가 여자에게 하는 말은 「일어나라. 가자.」뿐입니다.

이 두 발언 사이에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사사기 19장은 그 변화를 설명하는 대신, 두 사람이 함께 겪는 여행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에는 바티즈네 알라브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를 거슬러 음행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읽기를 따라,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남편을 배신한 것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그러나 칠십인역의 일부 전승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화를 냈다는 읽기가 나타나며, 다른 전승에서는 그를 떠났다는 사실만 서술합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헤어진 원인을 설명하는 고대 본문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했다고 옮겼지만, 본문은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떤 상태였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환대가 지나치게 넘치는 집에서 아무도 맞아들이지 않는 성읍으로

사사기 19:4–15 본문 →

여자의 아버지는 찾아온 사위를 기쁘게 맞습니다.

남자는 사흘 동안 장인과 함께 머무르며 먹고 마십니다. 넷째 날이 되자 떠나려 하지만 장인이 만류합니다. 다섯째 날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됩니다.

장인은 음식을 먹으라고 하고, 기운을 내라고 하며, 조금 더 머물라고 권합니다. 남자가 일어나려고 하면 다시 붙잡습니다.

그런데 뒤에 등장할 기브아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장인의 집에서는 손님이 떠나려고 해도 붙잡습니다. 기브아에서는 손님이 들어와도 아무도 집으로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섯째 날 남자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겠다고 결정합니다. 장인은 날이 저물고 있으니 하룻밤 더 묵으라고 권하지만 남자는 떠납니다. 이 선택 때문에 그 일행은 해가 질 무렵 여부스에 도착합니다.

여부스는 훗날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성입니다. 사사기 19장이 묘사하는 시점에는 여부스 사람들이 사는 성으로 소개됩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사건은 사무엘하 5:6–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인은 여부스에서 밤을 보내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거절합니다.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다른 민족이 사는 성에는 들어가지 않겠다. 기브아까지 더 가자.」사사기 19:12 · 두루새김

낯선 민족이 사는 성보다 자기 백성이 사는 성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기대하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렇게 일행은 여부스를 지나 베냐민 땅에 속한 기브아에 이릅니다.

그들은 밤을 지내려고 기브아로 들어갔습니다. 레위 사람은 성 안의 광장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집으로 맞아들여 재워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사사기 19:15 · 두루새김

그들에게는 숙박에 필요한 물품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뒤에서 남자는 나귀들에게 줄 짚과 먹이가 있고, 자신들과 하인이 먹을 빵과 포도주도 있다고 밝힙니다.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물자가 아니라 머물 곳을 내어 줄 사람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나그네를 환대하는 일은 단순한 친절 이상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여행자가 해가 진 뒤 낯선 성에서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었습니다.

레위기 19:33–34는 다른 지역에서 와서 사는 사람을 학대하지 말고 자기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10:18–19도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장면에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정체성과 실제로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삶 사이의 간격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성읍의 주민이 아니라 거류민이 나그네를 맞아들이다

사사기 19:16–21 본문 →

날이 저물자 한 노인이 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옵니다.

그때 한 노인이 저녁에 들일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에브라임 산지 출신으로 기브아에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 주민들은 베냐민 사람들이었습니다.사사기 19:16 · 두루새김

바로 이 사람이 광장에 앉아 있는 여행자를 발견하고 말을 건넵니다.

노인은 눈을 들어 광장에 있는 나그네를 보고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는 길이에요? 어디서 왔어요?」사사기 19:17 · 두루새김

이 질문은 사람을 알아보고 관계를 시작하는 말입니다. 노인은 그저 낯선 사람이 광장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지 않습니다.

레위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저희는 유다의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의 외딴 곳으로 가고 있어요. 저는 그곳 사람이에요. 유다의 베들레헴에 갔다가 지금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 그런데 아무도 저를 집으로 맞아들이지 않아요.」사사기 19:18 · 두루새김

그에게는 필요한 음식도 있고 가축에게 먹일 것도 있습니다. 그는 단지 밤을 보낼 장소가 필요합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걱정 말아요. 필요한 것은 모두 내가 마련할게요. 다만 광장에서 밤을 지내지는 말아요.」사사기 19:20 · 두루새김

그는 나그네를 자신의 보호 아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노인의 마지막 말에는 불길한 느낌이 담겨 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곧 벌어질 사건을 읽고 나면, 그 성의 밤거리가 안전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성에서, 그곳의 본래 주민들은 나그네에게 머물 곳을 내주지 않습니다. 오직 다른 지역에서 와서 사는 사람이 그들을 맞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노인도 이 장의 끝까지 올바른 인물로 남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여호와야훼의 집」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기록하며, 여호수아 18:1과 사사기 18:31에 등장한 실로 성소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반면 일부 칠십인역 전승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그가 실로에 반드시 들를 계획이었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을 보호한다면서 다른 사람을 내어 주다

사사기 19:22–25 본문 →

노인의 집에서는 여행자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십니다.

그들이 즐겁게 지내고 있을 때, 그 성의 악한 남자들이 집을 에워싸고 문을 세차게 두드렸습니다. 그들은 집주인인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네 집에 들어온 남자를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억지로 잠자리를 같이하겠다.」사사기 19:22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창세기 19장에서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을 에워싸고 방문객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사건과 매우 유사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낯선 방문객들이 성에 들어오고, 집주인이 그들을 맞아들이며, 그곳 사람들이 집을 에워싸고 방문객에게 성폭력을 가하려 합니다. 그리고 두 이야기 모두 집주인이 남성 손님을 지키려는 명분으로 여성들을 내놓겠다고 제안합니다.

소돔을 피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땅 안에 소돔과 같은 성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집주인이 밖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안 돼요, 형제 여러분. 제발 악한 짓을 하지 말아요. 이 사람은 내 집에 들어온 손님이에요. 이런 수치스러운 짓을 하지 말아요.」사사기 19:23 · 두루새김

그런데 바로 다음 말에서 그의 판단이 무너집니다.

「여기 아직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적 없는 내 딸과 이 남자의 첩이 있어요. 내가 그 여자들을 내보낼게요. 그 여자들과 억지로 잠자리를 같이하고 여러분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이 남자에게는 이런 수치스러운 짓을 하지 말아요.」사사기 19:24 · 두루새김

노인은 한 가지 악행을 막으려고 또 다른 악행을 제안합니다.

집주인이 손님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의무가 자기 딸이나 다른 여성의 생명을 희생시킬 권리를 주지는 않습니다.

노인은 사람을 보호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보호할 사람과 희생시켜도 되는 사람을 나누고 있습니다.

폭도들의 행동은 동의 없는 성폭력을 통해 타인을 지배하고 굴욕을 주려는 폭력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맞선 노인은 그 폭력을 끝내려 하지 않고, 폭력의 대상을 바꾸려 합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노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레위 사람은 자기 첩을 붙잡아 밖에 있는 그들에게 내보냈습니다. 그들은 여자와 억지로 잠자리를 같이하고 아침까지 밤새 잔인하게 괴롭혔습니다. 동이 틀 무렵에야 여자를 놓아주었습니다.사사기 19:25 · 두루새김

그는 앞에서 그녀를 다정한 말로 달래어 데려오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녀를 보호해야 할 관계에 있었지만, 오히려 그녀가 성폭력에 노출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여자를 밤새 강간하고 잔인하게 괴롭힌 직접적인 가해자들은 기브아의 폭도들입니다. 하지만 여자를 붙잡아 그들에게 내보낸 레위 사람에게도 중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다시 등장하는 곳은 집 안이 아니라 문밖입니다.

조금 더 깊이

「수치스러운 짓」은 단순히 무례한 행동이 아니라 공동체의 도덕적 질서를 심각하게 무너뜨리는 악행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창세기 34:7에서도 디나에게 가해진 성폭력을 두고 이와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17:6에서 서술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때에 사람들이 자기 눈에 옳은 일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19:24에서는 노인이 폭도들에게 여자들을 대상으로 「여러분 마음대로 해요」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이 말이 그들 눈에 좋은 대로 하라는 표현입니다. 두 표현의 히브리어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둘 다 자기 눈에 따른 판단을 행동의 기준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창세기 19장에서는 천사들이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공격자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그를 구합니다(창세기 19:10–11). 그러나 사사기 19장에서는 그런 개입이 묘사되지 않습니다. 호세아 9:9는 이스라엘의 부패를 기브아의 날들에 비유합니다. 호세아 10:9도 기브아의 날들을 이스라엘이 죄를 범한 역사와 연결합니다. 그 사건은 이스라엘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하는 역사적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문지방에 놓인 두 손

사사기 19:26–28 본문 →

아침이 밝아 올 무렵, 여자는 자신이 머물렀던 노인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여자는 새벽에 돌아와 자기 주인인 레위 사람이 머물던 집 문 앞에 쓰러졌습니다. 날이 밝을 때까지 그곳에 있었습니다.사사기 19:26 · 두루새김

본문은 여자가 언제 죽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주인은 아침에 일어나 집 문을 열고 길을 떠나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첩이 문 앞에 쓰러져 있었고, 두 손은 문지방에 놓여 있었습니다.사사기 19:27 · 두루새김

문지방은 집의 안과 밖을 나누는 자리입니다.

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보호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집 밖에서는 폭도들이 밤새 여자를 잔인하게 괴롭혔습니다. 그녀는 밤이 지나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 문 안에는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던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여자를 찾으러 나왔다고 소개되지 않습니다. 서술자가 밝히는 목적은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가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라. 가자.」 그러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는 여자를 나귀에 싣고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사사기 19:28 · 두루새김

이것은 3절의 다정한 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가 여자에게 건넨 말은 걱정이나 위로가 아니라 출발하자는 명령입니다.

사실 그녀는 이 장 전체에서 직접 말할 기회를 한 번도 얻지 못합니다.

사건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모두 남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결정의 가장 끔찍한 결과를 감당한 사람은 그녀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직접 전하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녀가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숨을 거두었는지, 그 후에 죽었는지, 28절의 침묵만으로 정확하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20:5에는 그녀가 죽었다는 남편의 진술이 나오지만, 19장의 서술 자체는 사망 시점을 밝히지 않습니다. 두 손이 문지방에 놓인 자세가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손을 뻗었기 때문인지, 단지 쓰러진 몸의 위치를 묘사하는 것인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한 여자의 몸이 온 이스라엘에 보내지다

사사기 19:29–30 본문 →

레위 사람은 여자를 나귀에 싣고 자신이 사는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칼을 집어 들고 여자의 몸을 열두 조각으로 잘라 이스라엘 온 땅에 보냅니다. 열두 조각이라는 수량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떠올리게 합니다. 한 사람의 몸이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충격적인 메시지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레위 사람은 기브아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을 이스라엘 전체가 알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건의 피해자인 여자의 몸을 다시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그의 행동을 오직 정의로운 고발로만 읽기 어렵습니다.

그는 실제로 끔찍한 범죄를 세상에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가 밤에 여자를 폭도들에게 내보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가 여자를 보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나중에 기브아 사람들의 악행을 고발했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는 여자가 당한 폭력을 온 이스라엘에 알렸지만, 그 폭력에 자신이 어떻게 관여했는지는 이 장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사기 20장에서 그의 진술을 읽을 때도 중요한 관찰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마다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은 일어난 적도, 본 적도 없어. 이 일을 잘 생각해 봐. 의논하고 의견을 말해 봐.」사사기 19:30 · 두루새김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억압과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시작한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억압당했던 경험을 기억하며, 자신들 가운데 사는 약한 사람과 다른 지역에서 와서 사는 사람을 돌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22:21은 다른 지역에서 와서 사는 사람을 학대하지 말라고 명령하며, 이스라엘 자신이 이집트에서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신명기 24:17–18 역시 다른 지역에서 와서 사는 사람과 고아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고, 이집트에서 종살이했던 일을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기브아의 사람들은 그런 기억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몸이 열두 조각으로 나뉘어 이스라엘 온 땅에 보내지고 나서야 사람들이 그 사건을 두고 의논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마침내 말하기 시작하지만, 정작 그 말을 가능하게 한 사건의 피해자는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사건을 본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히 놀라운 소식으로 소비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야 하고, 서로 의논해야 하며, 말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런 행동은 사무엘상 11:7에서 사울이 소 한 쌍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전역에 보내 군대를 소집하는 장면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가축을 나누어 보냈지만, 사사기 19장에서는 실제로 폭력의 피해자가 된 여자의 몸이 나뉘어 보내집니다. 마지막 세 명령은 「이 일을 잘 생각해 봐. 의논하고 의견을 말해 봐.」입니다. 이 말이 사건을 본 사람들의 발언이 계속되는 것인지, 서술자가 독자에게 직접 던지는 요청인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에는 말하는 사람이 바뀌었다는 명시적인 표시가 없습니다.

결론 — 열리지 않았던 문 앞에서

사사기 19:1–30 본문 →

이 장이 보여 주는 것은 단순히 법과 질서가 없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을 보호해야 할 관계와 책임이 도리어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로 변해 버린 문제입니다. 종교 공동체는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만으로 안전한 공동체가 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선한 책임을 지킨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문 안에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거나 행동하시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그분의 무관심이나 악행에 대한 승인으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장에서 확인되는 것은 서술자가 인간의 행동을 앞에 놓고 보여 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침이 됩니다.

문이 열립니다.

여자는 문 앞에 쓰러져 있고, 두 손은 문지방에 놓여 있습니다. 남자는 말합니다. 「일어나라. 가자.」

그러나 대답이 없습니다.

사사기 19장의 마지막에서는 온 이스라엘이 사건을 보고 놀라며 의논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독자가 바라보아야 할 장면이 있습니다. 그녀가 밤새 돌아오기를 바라며 향했던 집의 문, 그리고 그 문지방에 놓인 두 손입니다.

그 집에는 사람을 맞아들일 문이 있었지만, 정작 가장 보호받아야 했던 사람을 위해서는 그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