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서 풀어 읽기 · 30장
이 장의 자리 · 24–43장 · 지혜의 찬양
오래 사는 것과 삶을 누리는 것
집회서 30장은 매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앞에서는 아들을 엄격하게 다루라고 합니다. 뒤에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마음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 장은 1–13절의 자녀 훈육과 14–25절의 건강·기쁨에 관한 가르침으로 크게 나뉩니다.
그러나 두 부분을 함께 읽으면 공통된 관심이 드러납니다.
어떻게 살아야 삶의 마지막까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앞부분은 장래의 기쁨을 준비하는 삶에 관심이 있고, 뒷부분은 지금 주어진 삶을 실제로 누릴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엄격한 훈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정작 자신의 삶을 기쁨으로 누리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이 두 부분을 이러한 역설로 의도적으로 구성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장 안에 되풀이되는 기쁨과 슬픔의 말들은 독자가 두 가르침을 나란히 생각할 근거를 제공합니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아버지 — 자녀에게 이어지는 삶
1절은 사랑과 채찍질을 직접 연결합니다.
자기 아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들에게 거듭 채찍질할 것이다. 자기 말년에 아들 때문에 기뻐하기 위해서이다.집회서 30:1 · 두루새김
실제로 몸을 때리는 체벌을 교육의 일부로 여기는 관점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고대의 교육관을 오늘날의 자녀 양육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불편한 구절을 단순한 사랑과 관심의 비유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 화자가 바라보는 시간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입니다.
어린 아들이 당장의 욕망을 따라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면, 훗날 아버지와 아들 모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어려서부터 가르쳐 바로잡으면 아들이 훗날 가정과 공동체에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아버지도 그 모습을 보며 기뻐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아들을 가르쳐 바로잡는 사람은 아들 덕을 보고,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들을 자랑할 것이다.집회서 30:2 · 두루새김
아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원수가 시샘하게 하고, 친구들 앞에서 아들 때문에 크게 기뻐할 것이다.집회서 30:3 · 두루새김
여기에는 아버지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대 가족 질서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아들은 단순히 독립된 한 개인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과 가문의 명예를 이어 갈 사람으로 기대되었습니다. 아들이 지혜롭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자라면 아버지의 명예도 높아진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아들의 가치를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자랑과 이익을 가져다주는가에 따라 평가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아버지의 시선에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아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경험하는지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그 아버지는 죽었지만 죽지 않은 것과 같다. 자기 뒤에 자신을 닮은 아들을 남겼기 때문이다.집회서 30:4 · 두루새김
아버지가 죽더라도 그를 닮은 아들이 남아 있으므로, 아버지의 삶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한 외모의 닮음보다 넓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치고 훈육했다는 문맥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중요하게 여긴 삶의 방식과 가족의 책임을 아들이 이어 간다는 의미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5:3에서는 아담이 자기 모습과 형상을 닮은 아들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이 같은 교리를 펼치는 것은 아니지만, 자녀를 통해 세대가 이어진다는 생각을 공유합니다.
아버지는 살아 있을 때 아들을 보고 기뻐했고, 죽을 때도 슬퍼하지 않았다.집회서 30:5 · 두루새김
앞에서는 말년에 기뻐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죽음의 순간까지 기쁨의 전망이 이어집니다. 문맥상 아버지는 자신이 떠난 뒤에도 자신의 삶을 이어 갈 사람이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안심하는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복수할 사람을 남겼고, 친구들에게 은혜를 갚을 사람을 남겼기 때문이다.집회서 30:6 · 두루새김
이 표현에는 가문의 명예와 관계를 다음 세대가 책임진다는 사고방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친구는 아들에게도 은혜를 기억해야 할 사람이 되고, 아버지의 원수는 아들이 맞서야 할 사람으로 남습니다.
여기서 앞 장과의 긴장이 나타납니다.
집회서 28:1–7은 개인적인 보복을 엄격히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30:6에서는 원수들에게 복수할 아들을 남기는 것을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긴장을 없애기 위해 30:6의 복수를 단순히 공정한 재판이나 정의로운 방어만을 뜻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원수에 대한 보복이라는 강한 표현을 실제로 사용합니다.
28장은 원한을 품고 상대방에게 해를 되돌리려는 개인의 보복심을 경고합니다. 30장은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가문의 관계와 명예를 이어 갈 아들의 역할을 이야기합니다. 고대의 가문 중심적 가치관에서는 그러한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차이가 두 구절 사이의 모든 윤리적 긴장을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이 여섯 절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미래를 아들에게 걸고 있습니다.
아들의 성공은 자신의 기쁨이 되고, 아들의 명예는 자신의 명예가 되며, 아들의 삶은 자신의 삶이 계속되는 방식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기대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의 행동에 더욱 민감해질 수 있습니다.
7절부터는 그 불안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자녀를 걱정하는 아버지 — 사랑이 두려움과 만날 때
7절은 앞의 기쁨과는 다른 분위기를 만듭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의 목숨을 위해 자기 상처를 싸맬 것이고, 온갖 외침에 속이 뒤흔들릴 것이다.집회서 30:7 · 두루새김
화자는 아버지의 불안과 괴로움을 몸속 깊이 흔들리는 느낌으로 묘사합니다. 앞의 4–6절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미래를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들의 외침 하나에도 마음이 크게 흔들립니다.
길들이지 않은 말은 거칠어지고, 내버려 둔 아들은 제멋대로 행동하게 된다.집회서 30:8 · 두루새김
말은 강한 힘을 가진 동물입니다. 그러나 그 힘을 적절하게 다룰 수 있도록 길들이지 않으면 사람과 말 모두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화자는 아이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행동의 한계를 배우지 않으면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을 길들이는 일과 사람을 교육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동물의 훈련을 인간의 양육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으며, 자녀 역시 존엄과 판단 능력을 가진 인격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이의 응석을 받아 주면 아이가 너를 겁먹게 할 것이다. 아이와 함께 놀면 아이가 너를 슬프게 할 것이다.집회서 30:9 · 두루새김
아이와 함께 웃지 마라. 함께 괴로워하고 끝내 이를 갈게 되지 않도록 하여라.집회서 30:10 · 두루새김
그 배경에는 부모가 자녀와 지나치게 친밀해지거나 응석을 받아 주면, 자녀가 부모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가르치고 통제하는 사람이며, 아들은 그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당시의 가족 질서와 교육관을 반영하지만,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설명하는 유일한 성경적 방식은 아닙니다.
신명기 6:6–7에서는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되,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눕고 일어날 때에 말씀을 나누도록 명령합니다. 일상의 지속적인 관계가 교육의 자리가 됩니다. 잠언 17:6은 자녀와 부모 세대가 서로에게 영광과 자랑이 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러한 본문들을 함께 보면 성경의 자녀 교육을 부모의 통제와 자녀의 복종만으로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11–12절에서는 훈육의 강도가 더욱 높아집니다.
아들이 아직 어린아이일 때 옆구리를 힘껏 때려라. 고집이 세어져 네 말을 어기지 않게 하여라.집회서 30:12 · 두루새김
이는 단순히 단호한 태도를 가지라는 추상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신체에 힘을 가하는 훈육을 분명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오늘의 부모가 자녀를 때려도 된다는 직접적인 정당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는 고대의 신체적 체벌을 교육 수단으로 받아들였던 관점이 드러나지만, 그 관점이 모든 시대에 적용되어야 할 양육 방법이라는 주장은 본문 자체로 입증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자녀의 행동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이 있다고 해서 자녀에게 가해지는 신체적 고통이나 두려움이 자동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오랜 훈육의 책임과, 그 책임을 실천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체적인 체벌 방식은 구별해서 평가해야 합니다.
네 아들을 가르쳐 바로잡고, 그에게 공을 들여라. 그가 잘못을 저질러 네게 수치를 안기지 않도록 하여라.집회서 30:13 · 두루새김
자녀 교육은 한 번의 명령이나 처벌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노력과 관심이 필요한 일로 제시됩니다. 그리스어는 문법상 아들의 수치 때문에 아버지가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 단락의 중심에는 자녀의 독립적인 행복보다 아버지가 훗날 어떤 결과를 맞게 될 것인가 하는 관심이 놓여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 자라기를 바라며 많은 수고를 합니다. 그러나 그 수고가 자녀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자녀를 통해 자신의 명예와 만족을 얻으려는 것인지 스스로 돌아볼 필요도 있습니다.
자녀를 바르게 가르치려는 책임과 자녀를 자기 뜻대로 만들려는 욕망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상처가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아들을 달래는 행동과 상처를 싸매는 행동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아들을 지나치게 감싸는 아버지가 결국 아들 때문에 생긴 상처를 돌보게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뒤의 8–13절이 지나친 관대함과 방임을 경고한다는 점에서는 첫 번째 해석이 문맥상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아들의 목숨을 돌보려고 자신의 상처를 싸매는 모습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아들들의 목숨을 위해 자기 상처를 싸맬 것이고」라고 옮겨 두 번째 해석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원문의 모든 모호함이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채찍 맞은 몸 — 금보다 귀한 건강
건강하고 몸이 튼튼한 가난한 사람이, 몸이 고통에 시달리는 부자보다 낫다.집회서 30:14 · 두루새김
여기서 본문은 가치의 순서를 뒤집습니다.
일반적으로 재산이 많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보다 더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재산의 많고 적음보다 몸의 건강을 앞세웁니다.
1절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채찍질합니다. 14절에서는 부자가 몸에 채찍을 맞은 것처럼 고통받는 상태로 묘사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몸의 고통으로 풀어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두 자리에 채찍의 이미지가 이어집니다. 이 반복이 두 단락을 의도적으로 연결하려는 장치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앞에서는 채찍이 자녀의 미래를 위한 교육 수단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채찍 맞은 몸이 재산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고통의 이미지가 됩니다.
건강과 넘치는 기운은 모든 금보다 낫고, 튼튼한 몸은 헤아릴 수 없는 재산보다 낫다.집회서 30:15 · 두루새김
금은 물건을 살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자신의 몸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으로 좋은 음식을 구할 수 있지만, 몸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편안한 집을 가질 수 있지만, 몸의 고통 때문에 그 안에서 평안하게 지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몸의 건강보다 나은 재산은 없고, 마음의 즐거움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집회서 30:16 · 두루새김
몸의 건강과 마음의 즐거움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실제로 누리는 능력과 관계가 있습니다. 건강이 가치 있는 이유는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몸으로 살아가고, 움직이고, 먹고, 쉬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상 자체가 귀하기 때문입니다.
집회서는 건강을 부유함보다 앞세움으로써 인간의 삶을 재산의 액수로만 판단하는 생각을 흔듭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건강하지 못한 사람의 삶이 가치 없다는 뜻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건강이 얼마나 귀중한 선물인지를 강조하는 지혜문학적 비교를 사용합니다. 건강의 가치와 인간 자신의 존엄은 구별해야 합니다. 병들거나 장애가 있는 사람도 재산과 건강 상태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존엄을 가집니다.
음식이 있어도 먹을 수 없는 사람 —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고통
17절은 이 장에서 가장 무거운 문장입니다.
죽음은 쓰라린 삶이나 오래도록 낫지 않는 병보다 낫다.집회서 30:17 · 두루새김
「쓰라린 삶」은 단순히 불편하거나 만족스럽지 않은 생활을 뜻하는 표현보다 강합니다. 깊은 고통으로 인해 삶 자체가 괴롭게 느껴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고통이 계속되고, 언제 끝날지 알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먼저 이것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죽음을 선택하라고 명령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또한 병든 사람의 삶이 건강한 사람의 삶보다 가치가 낮다는 보편적인 선언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집회서는 여기서 극심한 고통이 인간에게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경험이 될 수 있는지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욥기 3:20–23에서 욥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왜 빛과 생명이 주어지는지 묻습니다. 욥기 7:15–16에서도 자신의 극심한 괴로움을 죽음과 비교합니다. 전도서 4:1–3 역시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바라보며 죽은 사람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을 살아 있는 사람보다 낫다고 표현합니다.
고통이 실제로 얼마나 무거운지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성경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식을 모든 사람의 삶에 적용되는 최종적인 가치판단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욥기의 전체 이야기도 욥의 고통에 대한 말들이 그의 삶의 최종 결론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18절에서는 갑자기 음식이 등장합니다.
닫힌 입 앞에 좋은 음식을 잔뜩 놓는 것은, 무덤 위에 음식 더미를 놓는 것과 같다.집회서 30:18 · 두루새김
이어지는 무덤의 이미지는 음식이 놓여 있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그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좋은 것이 가까이에 있어도 그것을 누릴 수 없다면, 그것이 실제로 그 사람에게 주는 유익은 제한됩니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좋은 음식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것을 먹을 수 없다면 재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누리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우상에게 제물을 바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우상은 먹지도 못하고 냄새도 맡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에게 쫓겨나는 사람도 그와 같다.집회서 30:19 · 두루새김
시편 115:4–7 역시 우상의 입과 눈과 귀와 코를 묘사하면서, 그것들이 실제로 말하거나 보거나 듣거나 냄새를 맡지 못한다고 풍자합니다. 집회서는 이러한 우상의 무능력에 관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눈앞에 있는 좋은 것을 실제로 누리지 못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쫓겨난 사람의 처지까지 비유에 포함됩니다.
그렇다고 실제로 병을 앓거나 음식을 먹기 어려운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뜻으로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건강의 가치와,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를 여러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으며, 모든 질병의 원인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눈으로 바라보며 탄식한다. 처녀를 껴안고도 탄식하는 고자와 같다.집회서 30:20 · 두루새김
이 비유는 성적인 관계를 누릴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예로 들어, 원하는 대상을 가까이하고도 기대하는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에는 고대 사회에서 고자의 성적 능력을 바라보던 제한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를 모든 고자의 신체적 경험이나 친밀한 관계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사실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서 6:1–2에서는 어떤 사람이 재산과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누리게 허락하지 않으시는 상황이 묘사됩니다. 또한 전도서 5:18–20은 먹고 마시며 자신의 수고 가운데 좋은 것을 누리는 일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몫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삶의 기쁨을 생각할 때는 재산과 건강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누릴 수 있는 마음도 살펴야 합니다. 이제 21절부터 화자는 바로 그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자기 마음을 위로하라 — 슬픔에 삶 전체를 내어주지 말라는 권고
21절부터 명령의 대상이 바뀝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아들을 훈육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독자 자신을 향해 말합니다.
네 마음을 슬픔에 넘겨주지 마라. 네 생각으로 너 자신을 짓누르지 마라.집회서 30:21 · 두루새김
슬픈 일이 생겼을 때 인간은 그 일을 반복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합니다. 이런 생각은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런 새로운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자기 자신을 계속 괴롭히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슬픔을 느끼는 것과 슬픔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잃거나 심각한 고통을 겪으면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곧 지혜가 부족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집회서 자체도 38:16–23에서 죽은 사람을 위한 애도와 슬픔을 다루며, 애도해야 할 때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30:21은 슬픔을 전혀 표현하지 말라는 금지로 읽기보다, 슬픔이 자신의 삶 전체를 압도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는 지혜의 권고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또한 지속적인 우울이나 심각한 정신적 고통이 단순히 마음먹기에 따라 사라진다고 말하는 구절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정신 질환의 원인이나 치료법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슬픔을 느끼는 사람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할 근거도 없습니다.
마음의 기쁨은 사람을 살게 하고, 즐거움은 오래 살게 한다.집회서 30:22 · 두루새김
여기서 화자는 몸과 마음을 완전히 분리하지 않습니다. 몸이 건강한 사람도 근심으로 괴로워할 수 있고, 마음이 기쁜 사람은 자신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혜문학적 표현입니다. 기쁨이 삶에 활력을 준다는 경험을 생명과 오래 사는 일에 관한 말로 강조한 것입니다.
너 자신을 사랑하고 네 마음을 위로하여라. 슬픔을 네게서 멀리 떼어 놓아라. 슬픔은 많은 사람을 죽였고, 아무 유익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집회서 30:23 · 두루새김
화자는 단순히 슬픔을 억누르라고만 하지 않습니다. 그 슬픔 속에 있는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집회서는 앞 장에서 가난한 사람을 돕고 다른 사람의 필요에 응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자신의 마음도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 제시합니다. 슬픔 때문에 자신을 지나치게 짓누르거나, 이미 지나간 일을 끝없이 후회하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현재의 삶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음을 돌보라는 권고입니다.
시기와 분노는 수명을 줄이고, 걱정은 때 이르게 늙게 한다.집회서 30:24 · 두루새김
시기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보면서도 다른 사람이 가진 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분노하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상처나 부당함에 매달릴 수 있습니다.
걱정하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날의 어려움을 현재의 마음속으로 끌어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때 이르게 늙게 한다」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의 무거움이 삶의 활력을 빼앗는 모습을 늙음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화자가 경계하는 것은 슬픔과 걱정의 존재 자체보다, 그것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누리는 능력까지 빼앗는 상태입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너 자신을 사랑하고」로 옮긴 자리에는 그리스어 아가파 텐 프쉬켄 수, 곧 자신을 사랑하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어 판본에는 아파타 텐 프쉬켄 수라는 읽기도 전해집니다. 이는 문맥상 자신을 달래거나 기분을 풀어 주라는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읽기를 따르더라도 이어지는 「네 마음을 위로하여라」와 함께 자신의 마음을 돌보라는 권고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집회서 1:12는 주를 경외하는 일이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14:11–16은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것을 누리되, 자신의 삶이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무한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도 당연한 소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밝고 선한 마음은 자기 음식을 돌본다
밝고 선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기가 먹는 음식을 잘 챙길 것이다.집회서 30:25 · 두루새김
단순히 많은 양을 먹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음식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화자는 밝고 선한 마음이 그러한 일상의 누림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여기서 「밝고 선한 마음」은 단순히 언제나 즐거운 감정을 느끼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시기와 분노, 걱정에 자기 삶 전체를 내어주지 않는 태도와도 관련됩니다.
다른 사람이 먹는 음식과 비교하느라 자신의 식사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내일의 걱정 때문에 오늘의 음식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 머물지 않으려 합니다.
전도서 9:7은 자신의 빵을 기쁨으로 먹고 포도주를 즐거운 마음으로 마시라고 권합니다. 그 말씀과 집회서 30:25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일상의 좋은 것을 누리는 삶이라는 주제를 공유합니다.
다만 이것을 언제나 식욕이 좋아야 마음이 건강하다거나, 음식을 즐기지 못하면 그 사람이 잘못 살고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몸의 상태와 삶의 형편에 따라 음식 자체를 먹거나 즐기기 어려운 경우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핵심은 인간이 반드시 일정한 방식으로 기뻐해야 한다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가능한 만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식탁 위에 놓인 음식
집회서 30장은 미래의 기쁨을 위해 애쓰는 아버지에게서 출발하여, 마침내 자기 앞의 음식을 잘 챙기는 사람에게 이릅니다. 삶을 잘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실제로 누리는 일도 중요합니다. 지혜로운 삶은 미래를 준비하는 수고와 오늘을 누리는 기쁨을 서로 적으로 만들지 않는 삶입니다.
닫힌 입 앞에 아무리 좋은 음식을 쌓아 놓아도 먹을 수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반대로 소박한 음식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누릴 수 있다면, 그 순간에는 금으로 살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먼 훗날의 행복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습니다.
지금 자신의 식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