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49장

이 장의 자리 · 37–50장 · 요셉과 이집트

책망까지 복이라 부르는 아버지의 마지막 말

죽음을 앞둔 야곱은 열두 아들을 모두 부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복을 빌어 줍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 세 아들에게 하는 말은 우리가 기대하는 축복과 거리가 멉니다.

맏아들 르우벤에게는 으뜸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그들의 분노를 저주하고, 그들을 이스라엘 안에 흩어 놓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다가 넷째 아들 유다에게 이르러서야 형제들의 칭찬과 복종, 왕의 권위에 관한 말이 나옵니다.

책망과 저주까지 포함된 말을 성경은 어째서 「복」이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야곱은 아들들에게 말하지만, 그 말은 아들 개인의 생애를 넘어 그들에게서 나올 지파들의 앞날을 향합니다. 아들의 이름은 한 사람의 이름이면서 장차 이스라엘을 이루는 집단의 이름이 됩니다.

창세기 49장은 한 가족의 지난 역사가 한 민족의 미래와 만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야곱은 과거의 잘못을 덮어 두지 않고, 각 아들의 서로 다른 앞날을 말합니다. 그 미래는 인간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출생 순서대로 펼쳐지지 않습니다.

이 장은 동시에 창세기의 오래된 질문 하나를 마지막으로 되살립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은 누구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 것입니까?

읽는 시간 28분소단락 1049장 본문 읽기 →

「모여라」 — 마지막 유언이 민족의 미래가 되다

창세기 49:1–2 본문 →

야곱은 아들들을 부르며 말합니다.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모여라. 훗날 너희에게 닥칠 일을 알려 주마.」창세기 49:1 · 두루새김
「야곱의 아들들아, 모여서 들어라. 너희 아버지 이스라엘의 말을 들어라.」창세기 49:2 · 두루새김

짧은 두 절 안에 모이라는 명령과 들으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아들들은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지만, 지금까지 서로 다른 욕망과 갈등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요셉을 미워했고, 형제들 사이에 편애와 경쟁이 있었으며, 심각한 폭력도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이제 아버지의 침대 곁에 함께 모입니다.

모두 함께 모였지만, 각자가 듣게 될 말은 다릅니다.

「훗날」은 언제인가

이 표현은 문맥에 따라 먼 미래를 가리킬 수 있고, 세상의 마지막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하여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49장에서 이 말을 반드시 세상 끝날에 일어날 사건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서 나올 지파들이 장차 어떤 처지에 놓일지를 말합니다. 그 말 가운데는 가나안에서의 지리적 위치, 다른 지파와의 관계, 전쟁과 생업, 다스리는 권한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따라서 「훗날」은 야곱이 죽은 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펼쳐질 미래를 넓게 가리킨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야곱은 어떤 지파를 사자에, 어떤 지파를 나귀에, 또 다른 지파를 뱀이나 암사슴에 비유합니다. 이는 미래의 사건을 날짜별로 예고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 지파의 성격과 앞날을 강렬한 모습으로 압축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비유에 대응하는 역사적 사건을 반드시 하나씩 찾아내려고 하면 오히려 본문의 의미를 좁힐 수 있습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 맏아들의 권리보다 중요한 것

창세기 49:3–7 본문 →

르우벤은 왜 으뜸이 되지 못하는가

야곱은 맏아들 르우벤에게 먼저 말합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맏아들, 내 힘이며 내 기운이 맺은 첫 열매다. 너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고 힘에서도 으뜸이다.」창세기 49:3 · 두루새김

그는 야곱이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첫 열매이며, 자연스럽게 가족 안에서 특별한 자리를 기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분위기가 급격히 바뀝니다.

「너는 물처럼 제멋대로 날뛰는구나. 너는 더는 으뜸이 되지 못할 것이다. 네가 아버지의 잠자리에 올라가 그곳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그가 내 잠자리에 올라갔구나!」창세기 49:4 · 두루새김

르우벤이 잃은 것은 맏아들이라는 출생의 사실이 아니라, 그 자리에 따를 것으로 기대되었던 으뜸의 지위입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35:22에 나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잠자리를 함께했습니다. 창세기 35장은 그 사건을 매우 짧게 기록하고, 이스라엘이 그 일을 들었다고만 말합니다. 당시에는 야곱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야곱은 그 사건을 다시 꺼냅니다.

여기서 「물처럼 제멋대로 날뛰는구나」라는 비유는 억누르지 못하는 충동을 묘사합니다. 물이 정해진 경계를 넘쳐흐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야곱은 아들에게 말하다가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일을 고발하듯 「그가」라고 말합니다. 시적 표현 속에서 비난의 강도가 높아지는 순간입니다.

가족 안에서 맏아들이 갖는 위엄은 단순히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존엄과 가족의 질서를 해쳤습니다.

창세기 49장은 가장 먼저 태어난 사람이 반드시 가장 앞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권리보다 책임의 문제에서 출발해 보여 줍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왜 함께 책망받는가

이어지는 두 아들은 따로 축복받지 않고 함께 등장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다. 그들의 무기는 폭력의 도구다.」창세기 49:5 · 두루새김

물론 열두 아들은 모두 형제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유독 이 둘을 형제라고 묶어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함께 저질렀던 폭력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34장에서 시므온과 레위는 여동생 디나가 당한 일을 계기로 세겜 사람들에게 보복했습니다. 그들은 세겜 남자들이 할례를 받은 뒤 회복 중일 때 도시를 공격해 남자들을 죽였습니다. 야곱은 그때도 아들들의 행동이 자신과 가족에게 위험을 가져왔다고 항의했습니다(34:30).

죽음을 앞둔 야곱은 그 행동을 다시 평가합니다.

「나는 그들의 비밀 의논에 끼지 않으련다. 그들의 모임에도 함께하지 않으련다. 그들은 화가 나서 사람을 죽였고, 제멋대로 소의 뒷다리 힘줄을 끊었기 때문이다.」창세기 49:6 · 두루새김

가족이 저지른 행동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그것을 옳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기 여동생에게 일어난 일을 문제 삼았다는 사실과, 그들이 행한 폭력이 정당했다는 주장은 서로 다릅니다. 창세기 34장은 디나에게 일어난 일의 심각성과 형제들의 폭력적인 보복을 모두 기록합니다. 야곱은 여기서 그 보복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6절에는 그들이 사람을 죽였을 뿐 아니라 소의 뒷다리 힘줄을 끊었다는 말도 나옵니다. 이는 동물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드는 행위입니다. 창세기 34장은 이 행동을 별도로 기록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사건을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의 흐름에서 인간뿐 아니라 가축에게까지 향한 파괴적인 폭력을 보여 주는 표현임은 분명합니다.

저주받는 것은 그들인가, 그들의 분노인가

「그들의 분노는 거세니 저주받기를, 그들의 화는 사나우니 저주받기를 바란다. 내가 그들을 야곱의 자손들 사이에 갈라놓고, 이스라엘의 자손들 사이에 흩어 놓겠다.」창세기 49:7 · 두루새김

야곱이 직접 저주하는 대상은 시므온과 레위라는 이름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분노와 화입니다.

이 차이를 과장해서 그들이 아무런 심판도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다음에 야곱은 그들이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후대에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땅 안에 속한 성읍들을 물려받습니다(여호수아 19:1–9). 레위 지파는 별도로 이어진 하나의 땅을 받지 않고 이스라엘 여러 지파의 땅에 있는 성읍들에서 살게 됩니다(여호수아 21장). 두 지파 모두 독립된 하나의 큰 땅을 중심으로 살아가지 않게 된다는 점에서 야곱의 말과 연결됩니다.

하지만 레위에게는 특별한 변화가 있습니다.

훗날 레위 지파는 성막과 제사장의 일을 맡는 지파로 구별됩니다. 신명기 33:8–11에서 모세는 레위에게 긍정적인 축복을 선언합니다. 창세기 49장의 책망이 곧바로 레위의 제사장 역할을 예고한 것은 아닙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역사적 자리에서 레위의 역할을 묘사합니다.

창세기 49장은 시므온과 레위의 폭력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레위 지파의 이후 역사가 보여 주듯, 이 책망이 그 후손들의 모든 가능성을 영원히 닫아 버리는 말도 아닙니다.

유다 — 형제들이 절할 사람은 누구인가

창세기 49:8–12 본문 →

넷째 아들에게 돌아가는 지도자의 자리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가 책망받은 뒤, 유다가 등장합니다.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높이 칭찬할 것이다. 네 손은 원수들의 목덜미를 붙잡을 것이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게 몸을 굽혀 절할 것이다.」창세기 49:8 · 두루새김

여기서 「유다」라는 이름과 「높이 칭찬할 것이다」(⁨יָדָ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사이에는 말놀이가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 29:35에서 레아가 유다를 낳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말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유다는 이름에 담긴 찬양의 뜻을 다시 듣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머니의 찬양이 아니라 형제들이 그를 높이 칭찬하게 될 미래가 말해집니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게 몸을 굽혀 절할 것이다」라는 말은 창세기 37장의 요셉의 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꿈에서는 형제들이 요셉에게 절했습니다. 실제로 형제들은 이집트에서 요셉 앞에 엎드렸습니다(창세기 42:6).

그런데 이제 야곱의 마지막 말에서는 유다가 형제들의 복종을 받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가족을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다는 베냐민을 대신해 자신을 내놓겠다고 나서면서 형제들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창세기 44:18–34). 이제 야곱은 유다의 집안에 형제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자리를 약속합니다.

하지만 유다 역시 잘못이 없던 사람은 아닙니다. 요셉을 팔자는 제안에 참여했고(37:26–27), 다말을 부당하게 대했다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했습니다(38:26). 따라서 유다가 지도자의 자리에 서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가장 훌륭한 형제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오히려 책임을 피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놓는 사람으로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자가 된 유다

야곱은 유다를 사자에 비유합니다.

「유다는 새끼 사자다. 내 아들아, 너는 사냥한 먹이를 뒤로하고 올라왔구나. 그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몸을 웅크리고 누웠으니, 누가 그를 일으키겠느냐?」창세기 49:9 · 두루새김

사자는 힘과 지배력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냥하고 있는 사자보다 사냥한 먹이를 뒤로하고 올라와 자리를 잡은 사자의 모습이 강조됩니다.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지만 아무도 그를 쉽게 건드릴 수 없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이 동물의 모습이 왕의 권위로 바뀝니다.

「실로가 올 때까지 유다에게서 왕의 지팡이가 떠나지 않고, 그의 두 발 사이에서 다스리는 이의 지팡이가 떠나지 않을 것이다.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창세기 49:10 · 두루새김

「왕의 지팡이」와 「다스리는 이의 지팡이」는 다스리는 권위를 나타냅니다. 이제 유다에게 약속된 지도력은 형제들 사이의 으뜸가는 자리를 넘어 민족들을 향한 통치권으로 넓어집니다.

「실로가 올 때까지」는 무슨 뜻인가

본문이 「실로가 올 때까지」라고 말하지만, 이 실로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첫째, 실로를 고유명사로 보는 읽기입니다. 둘째, 「그것이 속한 이」 또는 「그 권리를 가진 이」가 온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읽기입니다. 셋째, 유다에게 조공이나 예물이 바쳐지는 때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어느 읽기도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실로를 특정한 인물로 확정하거나, 이 단어 자체가 곧 메시아를 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문이 제공하는 증거를 넘어섭니다.

앞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유다의 집안에 다스리는 권한이 주어지고, 그 권한이 여러 민족에까지 미친다는 전망입니다. 이것은 훗날 유다 지파에서 다윗 왕조가 등장하는 역사와 중요한 연결을 이룹니다(사무엘하 5:1–5). 다윗에게 주어진 왕조의 약속(사무엘하 7:12–16)은 유다의 왕권에 관한 기대를 더욱 구체화합니다.

포도주로 옷을 빤다는 것은 어떤 풍요인가

왕권의 모습이 등장한 뒤, 야곱은 갑자기 포도나무와 나귀, 포도주와 젖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기 새끼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고, 암나귀의 새끼를 좋은 포도나무에 맨다. 그는 포도주로 옷을 빨고, 포도의 피로 겉옷을 빤다.」창세기 49:11 · 두루새김

포도나무는 귀중한 열매를 맺는 작물입니다. 그런데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어 놓는다면 나귀가 나무나 열매를 손상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런 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한 생활에서는 옷을 빨 때 물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는 포도주가 마치 물처럼 풍부합니다.

12절의 붉은 눈과 흰 이는 그 풍요의 모습을 계속 보여 줍니다. 눈과 이의 색을 포도주와 젖에 연결하는 표현으로 읽을 수 있지만, 정확한 문법적 관계에는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유다의 축복은 다스리는 힘뿐 아니라, 그 통치 아래 펼쳐질 풍요를 함께 바라봅니다.

다만 이 시는 좋은 통치의 구체적인 조건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후대 이스라엘의 왕들이 실제로 정의롭고 풍요로운 삶을 이루었는지는 각각의 역사 속에서 따져 보아야 합니다. 왕권에 대한 약속과 개별 왕의 행동을 무조건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실제로 성경에는 실로라는 지명이 등장하며, 훗날 성막이 머물렀던 장소로 알려집니다(여호수아 18:1). 그러나 이 지명이 유다의 왕권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쉽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번역인 칠십인역은 이 표현을 「그를 위해 마련된 것」이라는 의미로 읽었습니다. 이 경우 왕권을 받을 정당한 권리자에게 초점이 놓입니다. 조공이나 예물이 바쳐지는 때로 읽는 경우 뒤의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이후 시편 2편과 72편 등에서는 왕의 통치가 이스라엘뿐 아니라 여러 민족과 관계를 맺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신약의 요한계시록 5:5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지파의 사자」라고 부릅니다. 이는 창세기 49장의 사자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다시 사용하는 후대의 신학적 연결입니다. 먼저 본문이 유다의 집안에 왕권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 왕권의 약속이 다윗 왕조를 거쳐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읽히는 것입니다.

스불론과 잇사갈 — 같은 땅에서 살아도 미래는 다르다

창세기 49:13–15 본문 →

유다의 장대한 축복이 끝나자 시는 매우 짧아집니다.

스불론에게 주어진 말은 한 절, 잇사갈에게 주어진 말은 두 절입니다. 두 지파의 앞날은 서로 다른 땅과 생활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바닷가에 사는 스불론

「스불론은 바닷가에 살 것이다. 그는 배들이 머무는 해안에 살고, 그의 땅 경계는 시돈까지 이를 것이다.」창세기 49:13 · 두루새김

시돈은 지중해 동부 해안에 있는 도시로, 고대에 바다를 오가며 물건을 사고파는 일과 연결되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스불론의 축복은 바다와 관련된 활동이나 배로 물건을 사고파는 일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19:10–16에서 묘사되는 스불론의 땅은 지중해 해안에 직접 닿는 것으로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창세기 49장의 말과 여호수아의 땅 기록을 완전히 일치하는 지도처럼 읽기는 어렵습니다. 창세기 49장의 말이 스불론의 활동 범위나 주변 지역과의 관계를 폭넓게 묘사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정확히 어떤 지리적 상황을 가리키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좋은 땅을 얻었는데 왜 강제로 일을 하는가

잇사갈의 축복은 조금 더 복잡합니다.

「잇사갈은 뼈대가 굵은 나귀다. 두 짐 사이에 누워 있다.」창세기 49:14 · 두루새김

나귀는 무거운 짐을 나를 수 있는 힘 있는 동물입니다. 여기서 잇사갈은 약한 존재라기보다 강한 몸을 가진 존재로 그려집니다.

「그는 쉴 곳이 좋고 땅이 살기 좋은 것을 보고, 짐을 지려고 어깨를 굽혔다. 그렇게 강제로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창세기 49:15 · 두루새김

이 대목을 단순히 잇사갈이 게으르기 때문에 종이 되었다는 교훈으로 읽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잇사갈을 게으르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뼈대가 굵은 나귀로 묘사되며, 실제로 짐을 지기 위해 어깨를 굽힙니다.

좋은 땅에 자리 잡는 일과 자유를 누리는 일은 반드시 같지 않습니다. 풍요로운 땅에서 살아도 다른 사람의 지배 아래 노동해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47장에서 이집트 사람들이 경험한 현실과 닮은 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땅을 파라오에게 넘겼고, 이후 농사를 지으며 수확의 일부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잇사갈의 말이 이집트의 특정 제도를 직접 가리킨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땅이 좋다는 사실만으로 그 땅에 사는 사람의 처지가 모두 좋은 것은 아닙니다.

단, 갓, 아셀, 납달리 — 작은 지파들의 서로 다른 생존 방식

창세기 49:16–21 본문 →

단은 왜 뱀인가

단에게 주어진 말은 그의 이름과 연결되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서 자기 백성 사이의 옳고 그름을 가릴 것이다.」창세기 49:16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단」(⁨דָּן⁩)과 판결한다는 뜻의 동사가 같은 어근과 연결됩니다. 이는 단의 출생 당시 라헬이 하나님이 자신의 사정을 판결해 주셨다고 말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단이라고 지은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창세기 30:6).

그런데 야곱은 단을 갑자기 뱀에 비유합니다.

「단이 길가의 뱀, 오솔길의 독사가 되기를 바란다. 그 뱀은 말의 발뒤꿈치를 물어 말을 탄 사람을 뒤로 떨어뜨린다.」창세기 49:17 · 두루새김

이는 정면에서 압도적인 힘으로 맞서는 방식이 아니라, 상대의 약한 부분을 공격하여 큰 결과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단은 열두 지파 가운데 하나로서 자기 역할을 수행할 것이며, 규모나 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적에게 맞설 수 있습니다.

축복 가운데 갑자기 들리는 기도

단의 이야기가 끝나자 야곱은 갑자기 하나님을 부릅니다.

「여호와야훼, 저는 주님의 구원을 기다려 왔습니다.」창세기 49:18 · 두루새김

지금까지 야곱은 아들들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께 직접 말합니다. 「기다려 왔습니다」라는 말에는 야곱의 오랜 생애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의 모든 결과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유다에게는 사자의 힘이 있고, 단에게는 뱀의 날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앞날을 결정하는 것이 인간의 힘과 전략만은 아닙니다.

그의 긴 축복 한가운데 놓인 짧은 기도가 이 장 전체의 시선을 하나님께 향하게 합니다.

갓은 습격을 받지만 다시 맞선다

갓에게 주어진 말에는 반복적인 말놀이가 사용됩니다.

「적의 무리가 갓을 덮치겠지만, 갓도 그들의 뒤를 덮칠 것이다.」창세기 49:19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갓의 이름과 적의 무리를 가리키는 말, 덮친다는 뜻의 동사가 비슷한 소리로 반복됩니다. 훗날 갓 지파는 요단강 동쪽에 자리 잡습니다(민수기 32장; 여호수아 13:24–28). 이 지역에서 주변 집단과의 충돌을 경험하는 모습은 이 시의 전투 장면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위협을 받지만 맞서 싸우며 살아남는 삶입니다.

아셀과 납달리 — 풍요와 자유의 이미지

아셀에게는 먹을거리와 맛있는 음식의 모습이 주어집니다.

「아셀의 먹을거리는 기름지다. 그는 왕이 먹을 만한 맛있는 음식을 내놓을 것이다.」창세기 49:20 · 두루새김

아셀은 훗날 가나안 북서부의 풍요로운 지역과 연결되는 지파로 등장합니다(여호수아 19:24–31). 야곱의 시는 그 지파가 풍부한 먹을거리를 내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납달리의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납달리는 풀려난 암사슴이다. 그는 아름다운 말을 한다.」창세기 49:21 · 두루새김

암사슴은 빠르고 가볍게 움직이는 동물입니다. 「풀려난」이라는 표현은 묶여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는 「아름다운 말」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두 모습은 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풀려난 암사슴이 아름다운 말을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비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지파는 전쟁에서 생존하는 모습으로, 어떤 지파는 풍부한 음식을 생산하는 모습으로, 또 다른 지파는 자유로운 동물의 모습으로 소개됩니다.

이스라엘의 미래가 하나의 똑같은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왜 하필 단의 축복 뒤에 이런 기도가 등장할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뱀의 공격과 전쟁의 위험을 묘사한 뒤 하나님의 구원을 구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여러 아들의 앞날을 말하던 야곱이 자신과 후손들의 미래를 생각하며 잠시 기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도 21절에는 문법적인 전환이 있습니다. 암사슴을 가리키는 낱말은 여성형이지만, 뒤의 동사는 남성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뒤의 동작이 암사슴을 계속 가리키는지, 아니면 납달리라는 지파 자체를 가리키는지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또한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식물이 자라 열매를 내는 모습으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납달리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예고하는지는 불확실합니다.

요셉 — 공격받았지만 꺾이지 않은 가지

창세기 49:22–26 본문 →

유다에게 긴 축복이 주어졌듯, 요셉에게도 여러 절에 걸친 긴 축복이 주어집니다.

유다에게는 사자와 왕의 지팡이가 중심에 있었습니다. 요셉에게는 열매 맺는 가지와 샘, 활과 화살, 그리고 하늘과 땅의 복이 등장합니다.

샘가에서 담을 넘어 뻗은 가지

「요셉은 열매 맺는 가지, 샘가의 열매 맺는 가지다. 그 곁가지들이 담을 넘어 뻗었다.」창세기 49:22 · 두루새김

샘가의 식물은 계속 물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열매를 맺고 가지를 뻗습니다. 특히 곁가지들이 담을 넘어 뻗었다는 표현은 풍요가 한정된 공간에 머무르지 않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쫓겨나듯 이집트로 팔려 갔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새로운 삶을 이루었고,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양식을 공급받았습니다. 요셉의 삶은 처음 그에게 주어졌던 가족의 범위를 넘어 더 넓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활 쏘는 사람들과 굳건히 버틴 활

그런데 다음 절에서는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집니다.

「활을 든 자들이 그를 괴롭히고, 그에게 화살을 쏘며 그를 미워했다.」창세기 49:23 · 두루새김

샘가에서 자라던 가지의 이미지는 공격받는 전사의 이미지로 바뀝니다. 형제들의 미움을 받았고, 노예로 팔렸으며, 부당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야곱은 그 고통을 활을 든 자들의 공격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 공격이 요셉을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활은 굳게 버텼고, 그의 두 팔은 날쌔게 움직였다. 야곱의 강하신 분께서 손으로 도우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목자이시며 이스라엘의 바위이시다.」창세기 49:24 · 두루새김

공격받던 요셉 자신도 활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는 단순히 공격을 견뎌 낸 피해자만은 아닙니다. 공격 속에서도 자신의 힘을 잃지 않고 살아남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힘의 근원을 요셉 자신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보호받은 것이 아니라, 공격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요셉 자신이 형제들에게 했던 고백과 연결됩니다. 그들은 요셉을 해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많은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이끄셨습니다(창세기 50:20).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졌다는 이유로 그 과정에서 저질러진 악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팔았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이 결과적으로 많은 생명을 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서 형제들의 행동이 선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과 깊음과 태의 복

25절에서 요셉의 축복은 더욱 넓어집니다.

「그 힘은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기를 바란다. 샤다이께서 네게 위 하늘의 복, 아래에 있는 깊은 물의 복, 젖가슴과 태의 복을 주시기를 바란다.」창세기 49:25 · 두루새김

하늘의 복은 비와 하늘에서 오는 풍요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래의 깊은 물은 땅 아래의 물과 생명의 근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젖가슴과 태는 출산과 양육, 후손의 번성을 나타냅니다.

요셉에게 주어지는 복은 단순히 재물이 많아지는 것을 넘어, 하늘과 땅과 생명의 번성이 함께하는 모습으로 넓어집니다. 이는 처음 창조 때 하나님이 생명에게 주셨던 번성의 복을 떠올리게 하며, 아브라함의 후손이 크게 번성하리라는 약속과도 연결됩니다.

「형제들 가운데 따로 세워진 이」

「네 아버지의 복은 나를 낳은 이들의 복보다 더 커서, 오랜 언덕들의 끝까지 미쳤다. 그 복이 요셉의 머리에, 형제들 가운데 따로 세워진 이의 머리 위에 내리기를 바란다.」창세기 49:26 · 두루새김

문맥에서는 형제들 사이에서 특별한 위치에 놓인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요셉은 실제로 형제들과 떨어져 오랫동안 이집트에서 살았습니다. 또한 이집트에서 높은 지위에 올랐고, 가족 전체를 살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요셉과 유다, 두 중심의 차이

훗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유다는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왕권과 깊게 연결되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중요한 지파들을 이루게 됩니다. 특히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사용됩니다.

가족을 살린 사람은 요셉이지만, 왕권의 전망은 유다에게 주어집니다.

창세기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한 형제의 뛰어남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역할을 지닌 형제들의 집안이 함께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룹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22절의 원문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열매 맺는 가지」로 읽는 해석 외에도 동물을 가리키는 이미지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이 따르는 식물 비유에서는 샘과 가지와 담이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만 24절에서 두루새김이 「그분은 목자이시며 이스라엘의 바위이시다」로 옮긴 원문은 매우 압축적입니다. 원문에서는 「목자」와 「바위」를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이해할 수 있고, 문장 안에서 요셉이나 다른 인물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연결하려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특히 원문의 「거기에서」에 해당하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대목을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풀어 옮겼습니다. 따라서 이 절을 해석하면서 모든 문법적 어려움이 해결된 것처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베냐민 — 막내아들에게 주어진 거친 비유

창세기 49:27 본문 →

마지막으로 베냐민이 등장합니다.

「베냐민은 먹이를 찢는 늑대다. 아침에는 잡은 먹이를 먹고, 저녁에는 빼앗은 것을 나눌 것이다.」창세기 49:27 · 두루새김

베냐민은 야곱이 특별히 보호하려 했던 막내아들입니다. 요셉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야곱은 베냐민마저 잃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를 이집트로 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창세기 42:36–38).

그런데 지금 야곱은 베냐민을 연약한 존재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늑대의 이미지는 사납고 공격적인 힘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아침에는 잡은 먹이를 먹고 저녁에는 빼앗은 것을 나눈다는 표현은 하루 내내 활발하게 움직이며 싸우는 성격을 강조합니다. 후대에 베냐민 지파에서 강한 전사들이 등장하는 모습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사사기 20:15–16; 역대상 12:1–2).

그러나 이 비유를 베냐민 지파의 모든 폭력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말씀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사사기 19–21장에서 베냐민 지파와 관련된 심각한 폭력과 내전이 기록된다는 사실은, 강한 전투 능력 자체가 도덕적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여기서 열두 아들의 축복이 끝납니다.

책망과 저주까지 포함해 모두를 축복했다고 말하는 이유

창세기 49:28 본문 →

모든 말이 끝난 뒤, 창세기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입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며 아들 하나하나에게 저마다의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창세기 49:28 · 두루새김

야곱은 모든 아들에게 같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지난 행동과 장래의 처지에 따라 각기 다른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축복은 단순히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말보다 넓은 문학적 기능을 가집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각 아들과 그 후손의 장래에 관해 선언하는 말 전체를 가리킵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는 심각한 책망을 받았지만, 28절은 그들을 열두 지파에서 제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아들들입니다.

야곱의 가족은 갈등과 죄로 인해 여러 차례 무너질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끝에서 열두 형제는 함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소개됩니다. 야곱은 잘못을 덮어 주기 위해 축복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그들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남겨 둡니다.

어떤 지파는 전쟁에 맞닥뜨리고, 어떤 지파는 강제로 일을 하는 부담을 지며, 어떤 지파는 흩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야곱의 축복을 모든 후손이 평탄한 삶을 살 것이라는 보장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장은 인간의 행동이 실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가족의 역사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 줍니다.

마지막 부탁 — 야곱은 왜 막벨라 굴을 자세히 설명하는가

창세기 49:29–32 본문 →

축복을 마친 야곱은 아들들에게 다시 명령합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나는 이제 죽어 먼저 세상을 떠난 내 겨레와 함께하게 된다. 나를 내 조상들 곁에,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묻어 다오.」창세기 49:29 · 두루새김

이 부탁은 앞서 요셉에게 했던 요청과 연결됩니다(창세기 47:29–31). 앞에서는 요셉 한 사람에게 맹세를 요구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아들에게 말합니다. 그의 장례가 단순히 요셉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기억하고 수행해야 할 일이 됩니다.

그런데 야곱의 설명은 유난히 자세합니다.

「그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다. 그 밭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사서 묘지로 삼은 곳이다.」창세기 49:30 · 두루새김
「그 밭과 그 안에 있는 굴은 헷 자손에게서 산 것이다.」창세기 49:32 · 두루새김

왜 같은 사실을 반복합니까?

약속받은 땅과 실제로 사들인 땅

창세기 23장에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묻기 위해 막벨라의 밭과 굴을 사들였습니다. 그는 그 땅을 공짜로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헷 사람들 앞에서 정식으로 값을 치르고 소유권을 얻었습니다.

그 땅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된 가나안 전체에 비하면 매우 작은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소유하게 된 땅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 47장의 경제 이야기와도 의미 있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집트에서는 기근 속에서 백성들의 땅이 파라오의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야곱의 가족은 파라오의 허락으로 좋은 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마지막에 강조하는 땅은 이집트에서 얻은 소유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오래전에 정당한 값을 치르고 사들인 가나안의 작은 묘지입니다. 그곳은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과 실제 소유가 처음으로 연결된 장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전체에 대한 약속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막벨라의 밭과 굴은 이미 그 가족의 소유입니다.

이집트에서 가족이 번성하더라도 조상들에게 주어진 땅의 약속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의 장례가 보여 주게 됩니다.

뜻밖의 이름, 레아

「사람들이 그곳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묻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를 묻었다. 나도 그곳에 레아를 묻었다.」창세기 49:31 · 두루새김

야곱이 오랫동안 사랑했던 사람은 라헬이었습니다.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그는 라반의 집에서 여러 해를 일했고, 라헬을 잃었을 때 깊은 슬픔을 겪었습니다. 라헬은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죽었고 그곳에 묻혔습니다(창세기 35:19). 야곱은 바로 앞 장에서도 요셉에게 그 일을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48:7).

그런데 막벨라의 가족 묘지에 묻힌 사람은 레아입니다.

창세기는 레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죽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야곱이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묻었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레아는 야곱에게서 여섯 아들과 딸 디나를 낳았습니다. 유다 역시 레아가 낳은 아들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과 함께 묻히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레아를 묻어 둔 조상들의 묘지에 자신도 묻어 달라고 합니다.

창세기의 마지막 가족 묘지 장면에서는 야곱이 더 사랑했던 사람과 실제로 가족의 역사를 함께 이루어 온 사람이 서로 다른 자리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본문은 그 차이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레아의 이름을 조용히 기록하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 짧은 한마디가 긴 가족사 전체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두 발을 침상 위로 모아들인 야곱

창세기 49:33 본문 →

마지막 절은 놀랄 만큼 담담합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명령하기를 마치고 두 발을 침대 위로 모아들였습니다. 그는 숨을 거두고 자기 겨레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창세기 49:33 · 두루새김

「자기 겨레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אָסַף⁩)라는 표현은 앞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죽음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된 원문의 표현을 풀어 옮긴 말입니다(창세기 25:8; 35:29). 이 말은 단순히 무덤에 묻혔다는 뜻과 구별됩니다. 야곱은 이 절에서 숨을 거두지만, 실제 장례와 매장은 다음 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조상들에게 속한 공동체와의 연결 속에서 죽음을 묘사하는 전통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만으로 죽음 이후의 상태를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잘못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가족의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일을 하며 하나의 이스라엘을 이루게 됩니다. 이제 살아남은 아들들에게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고 그가 명령한 일을 수행할 책임이 남습니다.

그는 아들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마친 뒤 두 발을 침대 위로 모아들였습니다.

자기 앞에 모여 있는 아들들의 장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말은 모두 마쳤습니다.

야곱은 그렇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