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31장

이 장의 자리 · 30–33장 · 회복의 약속

마음에 새겨진 언약, 돌아오는 백성

예레미야 31장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장면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작은 북을 들고 춤을 추며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한 어머니가 잃어버린 자녀들을 생각하며 위로받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기쁨을 약속하시지만, 그 기쁨에 이르기 전에 백성의 울음소리를 먼저 들려주십니다.

이 장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은 새 언약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가르침을 백성의 마음에 쓰시겠다는 선언입니다(31:31–34). 그런데 그 약속은 장의 한가운데를 지나서야 등장합니다.

왜 새 언약을 말하면서 이렇게 많은 장면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새 언약이 단지 새로운 종교적 가르침을 들여오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시고, 상처 입은 관계를 회복하시고, 죄 때문에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회복이 이전처럼 다시 무너지지 않도록 백성의 마음 자체를 새롭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831장 본문 읽기 →

다시 세워지는 이스라엘 — 잃어버린 곳에서 시작되는 회복

예레미야 31:1–6 본문 →

장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선언하며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의 모든 집안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31:1 · 두루새김

예레미야 시대에는 이미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하나의 통일된 왕국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무렵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했고,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의 위협과 심판을 겪고 있었습니다. 북쪽과 남쪽의 역사는 갈라졌고, 흩어진 백성의 운명도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집안을 다시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정치적 분열이나 멸망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약속의 최종 경계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칼에서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는 2절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광야를 지나던 옛 이스라엘의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곧바로 쉼을 얻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얻었지만 아직 정착할 땅에 이르지 못했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오는 백성에게도 비슷한 길이 열릴 것입니다.

다만 2절 후반부의 히브리어는 누가 쉼을 향해 나아가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쉼을 향해 나아간다는 뜻으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쉼을 주려고 나아가신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칼에서 살아남은 백성의 여정이 이제 쉼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멀리서 여호와야훼께서 내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했다. 그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이끌었다.」예레미야 31:3 · 두루새김

「영원한 사랑」은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사랑하셨다는 시간적 의미와, 끝없이 이어지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함께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에 나오는 「멀리서」 역시 공간적 거리와 시간적 거리를 모두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뜻으로도, 먼 옛날부터 이어 온 하나님의 사랑을 돌아본다는 뜻으로도 이해됩니다.

하나님은 이제야 이스라엘을 사랑하기로 결정하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사랑해 오신 백성을 다시 이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앞부분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성실함을 거듭 드러내셨습니다. 특히 예레미야 2:2에서는 광야 시절의 사랑을 기억하셨고, 3장에서는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을 돌아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오히려 죄가 실제였음에도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세워지고, 작은 북을 들고 춤을 추며, 사마리아의 산들에 포도밭을 가꿉니다. 포도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포도나무를 심고 직접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땅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명기 28:30에서는 언약의 저주 가운데 포도밭을 심어도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하는 일이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31:5는 그와 대조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심는 사람이 자신의 수고를 누리는 삶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산에서 파수꾼들이 이렇게 외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나라. 시온으로 올라가자. 우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로 가자.』」예레미야 31:6 · 두루새김

에브라임은 북왕국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북왕국의 여로보암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사하는 것을 막으려고 벧엘과 단에 별도의 예배 중심지를 세웠습니다(열왕기상 12:26–33).

그런데 이제 에브라임 산에서 시온으로 올라가자는 외침이 들립니다.

파수꾼의 외침도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적의 침입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예배하러 가자고 부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단지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일이 아닙니다. 갈라진 백성이 다시 같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일입니다.

돌아오는 길에서 아무도 빠뜨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31:7–14 본문 →

7절은 기쁨의 명령과 구원을 구하는 기도를 한자리에 놓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을 위해 기쁘게 노래해라. 민족들 가운데 으뜸인 백성을 위해 환호해라. 큰 소리로 알리고 찬양하며 이렇게 말해라. 『여호와야훼여,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을 구해 주십시오.』」예레미야 31:7 · 두루새김

이미 모든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환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 구원을 청하며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선언이 사람의 간절한 기도를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려 줍니다.

「보아라, 내가 그들을 북쪽 땅에서 데려오고 땅끝에서 모으겠다. 그들 가운데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과 다리를 저는 사람, 임신한 여자와 아이를 낳는 여자도 함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예레미야 31:8 · 두루새김

먼 길을 떠나기 위해 행렬을 꾸린다면 보통 가장 건강하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중심에 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으시는 행렬에는 혼자 걷기 어려운 사람, 쉽게 지치는 사람, 이동 중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단순히 회복의 결과로 장애가 사라질 사람들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들이 돌아오는 무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강조합니다.

「그들은 울며 올 것이고, 간절히 기도하는 그들을 내가 이끌겠다. 그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 길을 따라 물이 흐르는 시냇가로 데려가겠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이고, 에브라임은 내 맏아들이기 때문이다.」예레미야 31:9 · 두루새김

이는 길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제외하지 않고, 그들이 걸어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모습입니다. 출애굽의 광야에서는 물이 부족하여 백성이 원망하고 두려워했습니다(출애굽기 17:1–7). 이제 새롭게 돌아오는 길에서는 물이 흐르는 시냇가가 기다립니다. 옛 출애굽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겪었던 부족함과 불안을 뒤집는 회복의 모습입니다.

출애굽기 4:2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48장에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가운데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맏아들의 축복에 해당하는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예레미야 31장은 그 이름을 사용하여 북왕국을 대표하는 백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드러냅니다.

에브라임은 이미 오래전에 나라를 잃었고, 하나님을 저버린 역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맏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예레미야가 말했습니다. 「민족들아,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들어라. 멀리 있는 해안 지역에 알리고 이렇게 말해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모으시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 그들을 지키실 것이다.』」예레미야 31:10 · 두루새김

이스라엘이 흩어진 것은 단순한 국제정치의 불행만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미 그 일을 언약을 저버린 백성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명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회복도 새로운 강대국의 등장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흩으신 하나님이 친히 다시 모으십니다.

12–14절에서는 그 회복이 실제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보여줍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이 풍성하고, 가축이 늘어나며, 백성의 삶은 물이 흠뻑 스며든 동산처럼 됩니다.

여기서 기쁨은 막연한 종교적 감정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있고, 살아갈 곳이 있고, 함께 기뻐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 역시 풍성함을 누리지만, 그들과 나란히 백성 전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들로 배부르게 됩니다.

「그때 젊은 여자들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들과 노인들도 함께 기뻐할 것이다.」 여호와야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의 슬피 우는 소리를 기쁨의 소리로 바꾸겠다. 그들을 위로하고, 슬픔에서 벗어나 기뻐하게 하겠다.」예레미야 31:13 · 두루새김

그런데 이 말씀 바로 다음에 슬피 우는 소리가 다시 들립니다.

라헬의 울음과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예레미야 31:15–22 본문 →

15절은 앞의 기쁨을 갑자기 중단시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슬피 울며 쓰라리게 통곡하는 소리다. 라헬이 자기 자녀들 때문에 울고 있다. 자녀들이 없으니 어떤 위로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예레미야 31:15 · 두루새김

라헬은 야곱의 아내이며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입니다. 요셉에게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나왔고, 베냐민 역시 이스라엘의 한 지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라헬은 북쪽 에브라임과 남쪽 베냐민의 역사에 모두 연결되는 조상입니다.

창세기 35:16–20에서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그녀에게 자녀의 탄생은 자신의 죽음과 겹쳐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라헬이 이제 후손들을 잃은 어머니로 나타납니다.

라마는 베냐민 지역에 있던 성읍입니다. 예레미야 40:1에서는 바벨론으로 끌려갈 사람들이 라마에 모여 있었던 일이 기록됩니다. 두 본문의 장면을 반드시 같은 시점의 사건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라마라는 장소가 포로와 이별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본문은 이 부재를 모든 자녀의 죽음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이들, 흩어진 이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모두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자녀들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그 울음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그 소리를 들려주시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 앞날에는 희망이 있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네 자녀들이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예레미야 31:17 · 두루새김

이미 13절에서 슬피 우는 소리를 기쁨의 소리로 바꾸겠다고 하셨지만, 그 약속이 라헬의 울음을 생략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회복을 말하면서도 상실을 실제 상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장면은 에브라임에게 옮겨 갑니다.

「나는 에브라임이 탄식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주님께서 저를 벌하여 가르치셨고, 저는 길들지 않은 송아지처럼 벌을 받았습니다. 저를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돌아오겠습니다. 주님은 여호와야훼, 저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예레미야 31:18 · 두루새김

앞에서는 하나님이 에브라임을 맏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제 그 아들이 직접 말합니다. 단순히 억울하게 쫓겨난 피해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벌을 받을 이유가 있었던 존재로 자신을 이해합니다.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스스로 돌아올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습니다. 돌아서는 일조차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저는 돌아온 뒤에 뉘우쳤고, 깨달은 뒤에 제 허벅지를 쳤습니다. 젊은 날에 저지른 일의 수치를 짊어지고 있기에,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예레미야 31:19 · 두루새김

여기서 회개는 단순히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지나온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경험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겼던 길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그 결과를 부끄러워합니다. 허벅지를 치는 행동은 그 탄식의 강도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의 절정은 에브라임의 고백이 아니라 그 고백을 들으시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에브라임은 내게 소중한 아들이 아니냐? 내게 기쁨을 주는 아이가 아니냐? 내가 그를 꾸짖는 말을 할 때마다 여전히 그를 또렷이 기억한다. 그래서 그를 생각하면 내 마음 깊은 곳이 뒤흔들린다. 내가 반드시 그를 가엾게 여기겠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31:20 · 두루새김

아들을 기억하실 때마다 깊은 연민이 움직이는 아버지로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은 자신의 젊은 날을 수치로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그 에브라임을 여전히 소중한 아들로 기억하십니다.

두 기억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죄의 현실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아들을 대하시는 관계는 죄에 대한 판단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려 할 때, 그를 맞으시는 것은 잘못을 잊으신 무관심이 아니라 그를 여전히 기억하고 계신 아버지의 깊은 연민입니다.

21절에서 예레미야는 길을 알려 주는 돌기둥과 푯말을 세우라고 말합니다. 포로로 끌려갔던 길을 기억하고, 그 길을 따라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길이 이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 됩니다.

「등 돌린 딸아, 언제까지 이리저리 피해 다니겠느냐? 여호와야훼께서 이 땅에 새로운 일을 창조하셨다. 여자가 남자를 둘러쌀 것이다.」예레미야 31:22 · 두루새김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창조하셨다는 선언과 함께 이 문장이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평범한 질서로는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의 「내 마음 깊은 곳이 뒤흔들린다」는 원문에서 창자가 요동친다는 표현입니다. 현대 독자에게는 낯설지만, 히브리어에서 내장과 몸속 깊은 곳은 강렬한 감정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나타내는 자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22절의 「여자가 남자를 둘러쌀 것이다」를 여자가 남자를 감싸 보호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이전에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던 역할이 뒤집힐 만큼 안전한 시대가 온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거나 둘러싼다는 뜻으로 읽으면, 등 돌렸던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모습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의 정확한 대상과 행동은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문장을 특정한 출생 사건에 대한 직접 예언으로 단정하는 것 역시 문맥과 낱말만으로는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무너뜨리던 눈길이 이제 세우고 심는다

예레미야 31:23–30 본문 →

23절부터는 시선이 유다 땅으로 옮겨 갑니다.

사람들이 다시 그 땅에서 살며 예루살렘을 향해 축복할 것입니다. 농부들과 양 떼를 데리고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지친 사람들의 필요가 채워집니다.

앞에서는 사마리아의 산들이 회복되었다면, 이제는 유다의 성읍들과 거룩한 산이 회복됩니다. 1절의 「이스라엘의 모든 집안」이라는 약속이 북쪽과 남쪽을 모두 품고 있음을 다시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26절은 갑자기 일인칭으로 바뀝니다.

그때 나는 잠에서 깨어 주위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달콤한 잠이었습니다.예레미야 31:26 · 두루새김

이 「나」가 예레미야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본문 자체는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앞의 모든 약속이 꿈속에서 주어졌는지, 바로 앞의 일부 장면만 꿈과 연결되는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31장 전체를 하나의 꿈이었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랫동안 심판과 재앙을 전해야 했던 예언의 세계에서, 잠이 달콤했다는 고백이 나타납니다. 예레미야의 고통스러운 사명과 비교할 때, 이 장면은 앞에서 전해진 회복의 말씀과 정서적으로 어울립니다.

27–28절에서는 회복의 약속이 예레미야가 받은 부르심 자체와 연결됩니다.

「내가 그들을 뽑고 허물고 무너뜨리고 멸하고 재앙을 내리려고 깨어 지켜보았듯이, 이제는 그들을 세우고 심으려고 깨어 지켜보겠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31:28 · 두루새김

예레미야 1:10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민족들과 왕국들 위에 세워 뽑고 허물며, 멸하고 무너뜨리고, 세우고 심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두드러졌던 것은 뽑고 무너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세우고 심는 일이 앞에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만 백성을 살피시는 분이 아닙니다. 세우고 심는 일을 위해서도 지켜보십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1:12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이루려고 지켜보신다고 하셨던 선언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주의 깊은 눈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눈길이 이제 다시 세우는 일을 향합니다.

그러나 땅과 성읍을 회복시키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백성에게는 책임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그날에는 사람들이 더는 『아버지들이 덜 익은 포도를 먹었는데 자녀들의 이가 시리다.』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31:29 · 두루새김

이는 앞선 세대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후손이 고통을 받는 현실을 표현합니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여러 세대에 걸친 불순종을 지적했고, 유다가 조상들의 죄와 무관하게 멸망한 것도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이 조상의 잘못을 내세워 자기 책임을 이해하는 일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어지는 30절은 각 사람이 자기 죄에 대해 책임을 진다고 말합니다. 에스겔 18:2–4에서도 같은 속담이 등장하고, 각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주제가 길게 펼쳐집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가 다음 세대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공동체의 불순종이 후손들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죄가 자기 삶을 결정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책임과 응답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응답할 수 있도록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요?

바로 그 질문에 31–34절이 답합니다.

새 언약 — 돌에 새겨졌던 가르침이 마음에 쓰이다

예레미야 31:31–34 본문 →

「보아라, 그날이 오고 있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언약을 맺겠다.」예레미야 31:31 · 두루새김

언약이라는 말은 오늘날의 계약이라는 개념과 겹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백성을 연결하는 지속적인 관계와 그 관계에 따르는 약속과 의무까지 포함합니다. 새 언약은 아무 관계도 없던 사람들 사이에 처음으로 만들어지는 언약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나 그것을 깨뜨린 백성과 다시 맺으시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붙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맺은 언약과는 다를 것이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었는데도 그들은 내 언약을 깨뜨렸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31:32 · 두루새김

「손을 붙잡고」 이끌어 내셨다는 표현은 언약을 맺은 관계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먼저 구원하시고, 그 백성에게 자신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은 그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었는데도」라는 표현은 언약을 깨뜨린 일을 단순한 규칙 위반보다 훨씬 깊은 관계의 배신으로 나타냅니다. 예레미야 2–3장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혼인에 비유했던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 필요해진 이유는 이전 언약에 하나님의 가르침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언약을 받은 백성이 그 안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날들이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내 가르침을 그들 속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쓰겠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미야 31:33 · 두루새김

「가르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תּוֹרָה⁩)는 토라입니다. 이 낱말은 법이나 규정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백성에게 가르쳐 주시는 삶의 길을 가리킵니다.

옛 언약은 돌판에 기록되었고(출애굽기 31:18), 백성은 그 말씀을 듣고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의 문제는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이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17:1은 유다의 죄가 그들의 마음판에 새겨졌다고 말합니다. 죄가 마음에 깊이 새겨진 모습입니다.

그런데 31:33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가르침이 바로 그 마음에 쓰입니다.

이 약속은 단지 기억력을 높이거나 종교적 지식을 많이 갖게 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자리에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자리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30:6에서도 하나님은 백성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은 그러한 마음속 변화의 약속을 더욱 선명하게 표현합니다.

새 언약의 핵심은 가르침이 사라진다는 데 있지 않고, 백성과 하나님의 가르침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다는 데 있습니다.

「더는 저마다 자기 이웃이나 형제에게 『여호와야훼를 알아라.』라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예레미야 31:34 · 두루새김

이 구절을 모든 교육이나 공동체의 가르침이 불필요해진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하나님을 알라고 권해야 할 정도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4:22에서는 백성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책망받습니다. 9:23–24에서는 사람이 자랑할 것은 하나님을 알고 깨닫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22:15–16에서 하나님은 요시야가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던 일을 말씀하시며,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일이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일을 단순한 정보나 교리를 배우는 일로 줄여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분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관계 속의 앎입니다.

새 언약에서는 이 앎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든 언약 백성에게 주어집니다. 신분이나 지위가 하나님을 아는 관계의 특권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용서하시기에, 그들은 다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에브라임은 자기 젊은 날의 수치를 기억했고, 하나님은 그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아들로 기억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죄를 더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과거의 사실을 알 수 없게 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근거로 백성과의 관계를 계속 끊거나 그 죄를 다시 책임을 묻는 근거로 삼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지만, 용서하신 죄가 회복된 관계를 영원히 지배하도록 두지도 않으십니다.

새 언약의 약속은 결국 1절의 선언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새로운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이 다시 서로에게 속하는 관계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신약은 이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결합니다. 히브리서 8:8–12와 10:16–17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 말씀을 직접 인용하며, 누가복음 22:20은 예수님의 죽음을 새 언약과 연결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본문 자체에서는 먼저 포로와 심판을 겪는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주어진 언약 회복의 약속으로 읽어야 합니다.

하늘의 질서가 무너지지 않는 한 — 버리지 않겠다는 선언

예레미야 31:35–37 본문 →

새 언약의 약속 뒤에서 하나님은 갑자기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바다를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해를 주어 낮을 밝히고, 달과 별들이 정해진 질서를 따라 밤을 밝히게 하십니다. 바다를 뒤흔들어 파도가 으르렁거리게 하십니다.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야훼인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예레미야 31:35 · 두루새김
「이런 질서가 내 앞에서 사라진다면, 이스라엘 자손이 내 앞에서 언제까지나 한 민족으로 남아 있는 일도 그칠 것이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31:36 · 두루새김

하나님은 창조 세계의 지속적인 질서를 자신의 약속에 대한 보증으로 제시하십니다. 밤마다 달과 별들이 나타나고, 아침마다 해가 뜹니다. 바다에는 인간의 힘으로 완전히 다스릴 수 없는 거대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위에 있는 하늘을 다 재고, 아래에 있는 땅의 기초를 끝까지 살펴낼 수 있다면, 나도 이스라엘 자손 전체를 그들이 저지른 모든 일 때문에 버리겠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31:37 · 두루새김

이 말은 하늘의 물리적 크기를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쟁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인간의 능력으로 도달하거나 완전히 알아낼 수 없는 우주의 영역을 들어, 하나님이 백성을 완전히 버리시는 일이 얼마나 생각하기 어려운지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가 이미 전한 심판은 실제였고, 백성의 죄는 결코 무시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부정되는 것은 심판 그 자체가 아니라, 죄를 이유로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관계에서 영원히 지워 버리는 일입니다.

이 약속은 레위기 26:44–45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원수들의 땅에 있을 때에도 그들을 완전히 버리거나 언약을 깨뜨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더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는 그 죄 때문에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과거의 죄를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고,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은 그들이 앞으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미래를 보증합니다.

시체와 재의 골짜기까지 거룩해진다

예레미야 31:38–40 본문 →

예레미야 31장의 마지막은 뜻밖에도 성읍의 경계를 재는 이야기입니다.

「보아라, 그날이 오고 있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하나넬 탑에서 모퉁이 문까지 성읍이 나 여호와야훼를 위해 다시 세워질 것이다.」예레미야 31:38 · 두루새김

이어서 땅의 크기를 재는 줄이 가렙 언덕과 고아라는 곳을 향해 뻗어 갑니다. 가렙과 고아의 정확한 위치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이 회복시키실 성읍의 공간적 범위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백성에게는 실제로 살아갈 성읍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삶의 터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은 단순히 예루살렘이 다시 지어질 것이라는 말을 넘어섭니다.

「시체와 기름 섞인 재가 있는 골짜기 전체와, 기드론 시내까지, 동쪽 말 문 모퉁이까지 이어지는 모든 들판이 나 여호와야훼에게 바쳐진 거룩한 곳이 될 것이다. 성읍은 다시는 뽑히거나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남을 것이다.」예레미야 31:40 · 두루새김

시체와 기름 섞인 재가 있는 골짜기는 아름답거나 깨끗한 곳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죽음과 부정함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입니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의 힌놈 골짜기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7:31–32와 19:6–11에서 힌놈 골짜기는 우상숭배와 심판의 끔찍한 결과가 드러나는 곳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처럼 부정함과 심판의 기억을 품은 공간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곳이 될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옛 질서에서는 거룩한 공간과 부정한 공간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는 죽음과 심판의 흔적이 있던 성읍의 바깥쪽까지 하나님의 거룩함에 속합니다.

예레미야 1:10에서 등장한 뽑고 허무는 말도 여기서 마지막으로 뒤집힙니다. 「성읍은 다시는 뽑히거나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남을 것이다.」 예언자가 받은 부르심에서 시작된 심판의 말이 회복의 약속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선언을 역사 속에서 재건된 예루살렘이 이후 단 한 번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실제 예루살렘은 귀환 이후에도 전쟁과 파괴를 겪었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역사적 경험으로 이미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영원히 이어지는 회복의 미래를 그립니다.

그 미래의 중심에는 성읍의 크기나 정치적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이 있습니다.

마음에 쓰인 말씀과 땅에 그어진 측량줄

예레미야 31:1–40 본문 →

새 언약의 약속이 땅의 회복이나 백성의 돌아옴과 분리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는 일은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쓰시겠다는 가르침은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방식과 공동체를 이루는 삶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땅의 크기를 재는 줄이 예루살렘의 성벽을 따라 뻗어 갑니다. 성읍은 다시 지어지고, 사람들은 돌아와 그 안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줄은 사람들이 기대했을 법한 거룩한 중심부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시체와 기름 섞인 재가 있는 골짜기까지 뻗어 갑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마음에 자신의 가르침을 쓰시고, 무너진 성읍의 경계를 다시 그으십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경계 안에는 이전에 부정함과 죽음의 기억으로 남아 있던 골짜기까지 들어옵니다.

그곳까지 땅의 크기를 재는 줄이 닿는 장면으로 예레미야 31장은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