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18장
이 장의 자리 · 3–31장 · 세 친구와의 논쟁
악인의 운명을 말하며 욥을 바라보다
욥기 18장에서 빌닷은 욥의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고도 욥에게 가장 가혹한 말을 합니다.
그가 묘사하는 악한 사람은 빛을 잃고, 덫에 걸리고, 몸이 병들고, 집을 빼앗기며, 자손이 끊어지고, 마침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지금 욥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빌닷은 직접 「너는 악한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악한 사람의 운명이 어떠한지 길게 설명합니다. 그 말을 듣는 욥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한 사람이 멸망할 수 있다는 말과, 멸망에 가까운 고통을 겪는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는 말은 같지 않습니다. 앞의 말이 참이라고 해도 뒤의 결론이 반드시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빌닷의 말은 바로 그 두 판단 사이의 경계를 흐립니다.
빌닷은 욥의 고통을 듣고 있지만, 그 고통이 자기 생각을 바꾸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욥의 고통을 자신이 이미 믿고 있던 원칙에 맞추어 해석합니다.
이 장은 빌닷이 화를 내며 욥을 꾸짖는 말(1–4절)로 시작하여, 악한 사람이 빛을 잃고 덫에 걸리며 죽음에 이르는 과정(5–15절)을 지나, 그의 뿌리와 후손과 이름까지 사라지는 장면(16–20절)으로 나아갑니다. 마지막에는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운명이라고 선언합니다(21절).
처음에는 한 사람의 걸음이 멈추지만, 끝에 이르면 그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마저 남지 않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소멸을 묘사하는 빌닷의 말은 과연 하나님의 정의를 올바르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바위가 제자리에서 옮겨지겠어 — 흔들리지 않는 원칙에 대한 확신
「너희는 언제까지 말에 올무를 놓을 거야? 잘 생각해 봐. 그런 다음에 우리도 말하겠어.」욥기 18:2 · 두루새김
빌닷은 욥이 겪는 고통이나 그의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습니다. 먼저 욥의 말하는 방식을 문제 삼습니다.
「언제까지」라는 질문은 빌닷이 처음 말할 때에도 등장했습니다. 8:2에서 그는 욥이 언제까지 그런 말을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욥이 여전히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하고 있으며, 충분히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말에 올무를 놓을 거야」라는 표현은 원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원문의 첫 낱말은 올무와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말의 끝을 내는 것과 관련하여 읽기도 합니다. 따라서 욥이 말로 덫을 놓는다는 비난과, 언제까지 말을 계속하겠느냐는 책망 사이에 해석상의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두루새김처럼 「올무」로 읽으면 이 장의 문학적 특징이 드러납니다. 빌닷은 말의 올무를 비난한 뒤, 8–10절에서 악한 사람이 그물과 덫에 걸리는 장면을 길게 묘사합니다. 처음에 말에 관한 비유로 등장한 올무가 악한 사람의 실제 운명을 설명하는 중심 이미지로 발전합니다.
3절에서 빌닷은 자신의 자존심이 상했다고 말합니다.
「왜 우리를 짐승처럼 여기는 거야? 너희 눈에는 우리가 어리석어 보여?」욥기 18:3 · 두루새김
욥은 앞서 친구들 가운데 지혜로운 사람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17:10). 빌닷은 그 말을 자신과 친구들의 지혜를 무시하는 태도로 받아들인 듯합니다.
빌닷은 「우리를」이라고 말하고, 「너희」라는 복수형을 사용합니다. 마치 자신과 다른 친구들이 한편에 서 있고, 욥이 그들을 통째로 무시한다고 항의하는 듯합니다. 복수형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곧이어 4절에서는 욥을 향한 단수형으로 바뀝니다.
「너는 화가 나서 네 몸을 찢고 있어. 너 하나 때문에 땅이 버려지고, 바위가 제자리에서 옮겨지겠어?」욥기 18:4 · 두루새김
빌닷은 욥의 격렬한 탄식을 고통의 호소로 보기보다, 그 자신을 파괴하는 분노의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욥이 요구하는 예외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빌닷에게 세상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따라 움직입니다. 악한 사람은 심판받고 의로운 사람은 보호받습니다. 욥이 자신의 고통은 그 원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더라도, 빌닷은 세상의 질서 자체가 바뀔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욥이 말했던 바위가 빌닷의 입에서 다시 등장하다
욥은 14:18에서 산이 무너지고 바위가 제자리에서 옮겨지는 장면을 말했습니다. 그 뒤에는 물이 돌을 닳게 하듯 인간의 희망도 사라진다는 탄식이 이어집니다(14:19). 두 구절의 원문에는 바위가 제자리에서 옮겨진다는 동일한 표현이 어순만 달리하여 사용됩니다.
욥에게 바위가 옮겨지는 모습은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빌닷은 바로 그 이미지를 반대 방향으로 사용합니다. 욥 한 사람의 고통 때문에 바위가 움직여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두 사람은 같은 바위를 바라보지만, 한 사람은 무너지는 세계를 보고 다른 사람은 흔들려서는 안 되는 원칙을 봅니다.
빌닷의 말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려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그 원칙을 지키는 과정에서 욥이 실제로 겪고 있는 현실을 진지하게 살필 여지는 점점 사라집니다.
꺼진 등불과 막힌 발걸음 — 삶의 공간이 사라지다
「분명 악한 사람들의 빛은 꺼지고, 그들의 불꽃은 빛나지 않을 거야.」욥기 18:5 · 두루새김
빌닷은 악한 사람의 운명을 빛으로 시작합니다.
구약에서 등불은 단순한 조명 기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생명과 번영, 집안의 지속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잠언 13:9에도 악한 사람의 등불이 꺼진다는 지혜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빌닷은 그 표현을 곧 한 사람의 생활공간으로 좁힙니다.
「악한 사람의 천막 안에서는 빛이 어두워지고,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등불도 꺼질 거야.」욥기 18:6 · 두루새김
5절의 「악한 사람들」이라는 복수형이 6절에서는 「악한 사람의 천막」과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등불」로 바뀝니다. 여러 악한 사람에 관한 일반적인 선언이 한 사람의 집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고대의 천막은 사람이 머물며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등불이 켜져 있다는 것은 그 안에서 여전히 삶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의 멸망은 멀리 떨어진 전쟁터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가 매일 머무는 집 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욥은 이미 자신의 집안과 자녀들이 무너지는 일을 겪었습니다. 바로 앞 장에서는 어둠을 잠자리로 삼고 죽은 자들의 세계를 집으로 바라보는 모습을 말했습니다(17:13).
그런 사람 앞에서 빌닷은 악한 사람의 집이 어두워진다고 선언합니다.
빌닷이 의도적으로 욥의 상처를 겨냥했는지는 본문이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묘사가 욥의 실제 처지와 겹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7절에서는 악한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마저 막힙니다.
「힘차던 그의 발걸음은 막히고, 그가 세운 꾀가 그를 넘어뜨릴 거야.」욥기 18:7 · 두루새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던 사람이 더 이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외부에서 누군가 그를 쓰러뜨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계획하고 선택한 일이 도리어 자신을 파멸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그는 악한 사람이 단순히 불행한 일을 겪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 때문에 멸망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원칙은 악한 행동이 스스로 파멸을 불러오는 현실을 설명하는 데 유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적용하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욥이 실제로 어떤 악한 계획을 세웠으며, 그것이 어떻게 지금의 재앙으로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빌닷은 그것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빌닷의 선언은 잠언 13:9 같은 전통적인 지혜의 언어와 가깝습니다. 함정을 판 사람이 자신이 만든 구덩이에 빠지는 모습(시편 7:15–16)처럼, 자기 꾀에 넘어진다는 생각도 구약의 다른 지혜 본문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지혜 문학은 서로 다른 상황에 적용되는 여러 진술을 담고 있습니다. 잠언에는 악한 사람의 등불이 꺼진다는 선언이 있지만(잠언 13:9), 시편 73편에는 악한 사람들이 평안하게 번영하는 현실을 보고 괴로워하는 사람의 고백도 등장합니다. 이 두 본문이 서로 다른 현실을 말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정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과 시점을 현재의 형편만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어디에 발을 디뎌도 덫이 있다
「그가 제 발로 그물에 들어가고, 그물망 위를 걷기 때문이야.」욥기 18:8 · 두루새김
「덫이 그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올무가 그를 단단히 움켜쥘 거야.」욥기 18:9 · 두루새김
「그를 잡을 밧줄이 땅속에 숨겨져 있고, 그를 붙잡을 덫이 길 위에 놓여 있어.」욥기 18:10 · 두루새김
그물, 그물망, 덫, 올무, 밧줄, 또 다른 덫입니다. 이 반복은 단순히 표현을 풍성하게 하려는 장식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놓인 상황을 독자가 몸으로 느끼게 하는 장치입니다.
그는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모릅니다.
눈앞에 보이는 길은 안전하지 않고, 땅속에는 보이지 않는 밧줄이 숨어 있습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발뒤꿈치가 붙잡히고, 다른 길로 피하려 해도 또 다른 올무가 기다립니다.
8절은 악한 사람이 「제 발로 그물에 들어가고」 있다고 묘사합니다. 이것은 악한 사람의 멸망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그의 걸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빌닷의 관점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10절에서는 그를 잡을 밧줄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지만, 자신을 붙잡을 덫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빌닷의 세계에서는 악한 사람의 발걸음이 곧 파멸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걷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미 포위되어 있습니다.
11절에서 덫의 이미지가 공포로 바뀝니다.
「공포가 사방에서 그를 놀라게 하고, 발걸음마다 그를 내몰 거야.」욥기 18:11 · 두루새김
앞에서는 땅에 설치된 그물이 발을 붙잡았다면, 이제는 공포가 사방에서 그를 몰아붙입니다. 「발걸음마다 그를 내몰 거야」라는 표현은 공포가 그의 발뒤꿈치를 따라붙는 모습이나 공포에 질린 그가 제 발로 달아나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악한 사람이 마음대로 걸음을 멈추거나 방향을 선택할 수 없는 상태가 강조됩니다.
그런데 빌닷이 그리는 이 상태는 악한 사람의 운명인 동시에 욥이 겪는 극심한 불안과 닮아 있습니다.
욥은 지금 자신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공격하시는 것처럼 느끼며, 친구들의 말에서도 피할 곳을 찾지 못합니다. 하지만 빌닷은 그 경험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악한 사람의 파멸이라는 틀 속에 배치합니다.
그 결과 욥이 호소했던 공포는 위로받아야 할 고통이 아니라, 죄가 있음을 뒷받침하는 듯한 정황으로 바뀝니다.
죽음의 맏아들과 공포의 왕 — 몸에서 집까지 파고드는 파멸
「그는 굶주려 힘을 잃고, 재앙은 그의 곁에서 덮칠 준비를 할 거야.」욥기 18:12 · 두루새김
악한 사람을 뒤쫓던 공포는 이제 그의 몸으로 들어옵니다.
원문에서 기력이 굶주린다는 표현은 힘이 바닥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한때 힘차게 걸어가던 사람은 이제 스스로를 지탱할 힘마저 잃습니다.
빌닷이 악한 사람의 앞날을 예고한다고 읽을 수도 있고, 악한 사람에게 파멸이 닥치기를 바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어도 빌닷이 묘사하는 파멸은 극단적입니다.
「죽음의 맏아들이 그의 살갗을 삼키고, 그의 몸마저 삼킬 거야.」욥기 18:13 · 두루새김
「죽음의 맏아들」은 매우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살갗을 삼키고 몸마저 삼킵니다.
욥기의 독자는 여기서 욥의 피부병을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2:7에서 욥은 온몸에 악성 종기가 생겼고, 7:5에서는 피부에 관한 끔찍한 고통을 묘사했습니다.
빌닷은 악한 사람의 몸이 죽음의 힘에 먹혀 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눈앞의 욥은 실제로 피부가 병들고 몸이 쇠약해져 있습니다.
그는 특정 질병이 반드시 죄의 결과라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으면서, 몸이 파괴되는 모습을 악한 사람의 운명 속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14절에서는 죽음의 이미지가 왕의 모습으로 발전합니다.
「그가 믿고 의지하던 것이 그의 천막에서 뽑혀 나가고, 그는 공포의 왕 앞으로 끌려갈 거야.」욥기 18:14 · 두루새김
「공포의 왕」은 죽음을 통치자처럼 묘사하는 시적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11절에서 여러 공포가 사람을 둘러싸고 몰아붙였다면, 이제는 그 모든 공포의 끝에 왕처럼 군림하는 존재가 기다립니다.
그가 의지하던 것은 더 이상 그를 보호하지 못합니다. 집은 있지만 그 집에 머물며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15절에서는 그가 떠난 공간마저 파괴됩니다.
「그의 것이 아닌 것이 그의 천막에 자리 잡고, 그가 살던 곳에는 유황이 뿌려질 거야.」욥기 18:15 · 두루새김
「그의 것이 아닌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낯선 존재가 그의 집을 차지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그 집을 파괴하거나 황폐하게 만드는 무엇이 머문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유황은 파괴의 인상을 더욱 강하게 만듭니다.
악한 사람의 몸과 살던 곳이 함께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닷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한 사람이 죽는 것보다 더 철저한 소멸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첫 동사는 문맥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나타내거나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앞뒤의 운명 묘사에 맞추어 「덮칠 준비를 할 거야」라는 예고로 옮겼습니다. 이 차이는 작지 않습니다. 빌닷이 악한 사람의 운명을 설명하는 것과 악한 사람의 파멸을 바라는 것은 서로 다른 방식의 말하기이기 때문입니다. 13절의 「죽음의 맏아들」은 문자 그대로 죽음의 맏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맏아들은 종종 특별한 지위와 힘을 지닌 존재로 나타납니다. 야곱은 르우벤을 자신의 맏아들이며 힘의 시작이라고 불렀습니다(창세기 49:3). 이러한 쓰임을 고려하면 죽음의 맏아들은 죽음의 힘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존재나 파괴적인 힘을 사람처럼 그린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극심한 질병이 이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특정한 병명을 제시하지 않으며, 따로 존재하는 초자연적 존재의 정체를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어떤 특정한 질병이나 죽음의 천사라고 확정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섭니다. 14절의 「공포의 왕」도, 이 표현만으로 고대 사람들이 특정한 이름의 죽음 신을 믿었다거나 빌닷이 그런 존재를 신앙의 대상으로 인정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의 초점은 악한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궁극적인 공포에 있습니다. 15절의 유황과 관련하여, 창세기 19:24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쏟아집니다. 따라서 유황은 구약의 독자에게 심판으로 황폐해진 땅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욥기 18:15가 반드시 소돔 사건을 직접 가리킨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뿌리가 마르고 이름이 사라지다
「아래에서는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에서는 그의 가지가 시들 거야.」욥기 18:16 · 두루새김
빌닷은 갑자기 악한 사람을 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단순히 잘려 나가지 않습니다. 아래의 뿌리도 마르고 위의 가지도 시듭니다. 나무의 위아래가 함께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욥기 14장의 나무와 중요한 대조를 이룹니다.
욥은 14:7–9에서 나무가 베이더라도 다시 싹을 낼 희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뿌리가 오래되어도 물기만 있으면 새 가지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닷이 묘사하는 악한 사람의 나무에는 그런 가능성이 없습니다. 뿌리부터 마르고 가지까지 시들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베는 것은 지금의 성장을 멈추게 하는 일이지만, 뿌리까지 말라 버리면 새롭게 자라날 바탕마저 사라집니다. 한 사람에게서 앞으로 이어질 삶의 가능성이 완전히 끊어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17절은 그것을 사회적인 영역으로 확장합니다.
「땅에서는 그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거리에는 그의 이름이 남지 않을 거야.」욥기 18:17 · 두루새김
고대 사회에서 이름과 기억은 한 사람의 삶이 공동체 안에 남는 중요한 방식이었습니다. 사람이 죽더라도 그의 이름은 가족과 후손의 기억 속에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닷이 말하는 악한 사람은 그 모든 흔적을 잃습니다.
단순히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고,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6절의 천막과 17절의 거리가 대조됩니다. 처음에는 집 안의 등불이 꺼졌습니다. 이제는 집 밖의 세상에서도 그 이름이 사라집니다.
「그는 빛에서 어둠으로 밀려나고, 세상에서 쫓겨날 거야.」욥기 18:18 · 두루새김
앞에서는 등불이 꺼졌지만, 이제는 악한 사람 자신이 빛에서 어둠으로 밀려납니다. 집 안의 빛을 잃는 것에서 시작된 파멸이, 그가 세상의 빛 아래 머물 자리조차 잃는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19절은 소멸의 마지막 단계를 제시합니다.
「그의 백성 가운데는 그의 자손도 후손도 없고, 그가 살던 곳에는 살아남은 사람도 없을 거야.」욥기 18:19 · 두루새김
욥은 이미 모든 자녀를 잃었습니다(1:18–19). 그에게 자녀의 죽음은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막연한 위협이 아니라 이미 겪은 현실입니다.
그런 욥에게 빌닷은 악한 사람의 자손과 후손이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빌닷이 욥의 자녀들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본문을 따라 읽는 독자에게 이 말이 욥의 상실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더구나 빌닷은 첫 번째 발언에서도 욥의 자녀들을 언급했습니다. 8:4에서 자녀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면 그 죄 때문에 죽음에 넘겨졌을 수 있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자녀의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그는 먼저 그 상실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이라는 틀로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욥기의 서두는 그러한 해석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욥의 자녀들이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악한 사람에게 내린 형벌이라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빌닷의 말은 욥에게 닥친 사건의 원인을 밝혀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욥의 고통을 악한 사람에 관한 일반적인 묘사 속에 집어넣고 있을 뿐입니다.
온 세상이 경악하지만 아무도 진실을 묻지 않는다
「그에게 재앙이 닥친 날을 보고 서쪽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동쪽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힐 거야.」욥기 18:20 · 두루새김
빌닷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 사람의 파멸에서 온 세상의 반응으로 확대합니다.
이 부분에는 번역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시간적 해석을 따르면 이전 사람들과 이후 사람들이 모두 악한 사람의 파멸에 크게 놀란다는 뜻이 됩니다. 공간적 해석을 따르면 동서의 모든 사람이 그의 운명을 보고 놀란다는 의미가 됩니다. 두 읽기 모두 악한 사람의 파멸이 한 지역이나 한 시대에만 알려지는 사건이 아니라 널리 알려지는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독특한 역설이 있습니다.
17절에서는 악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그의 이름이 남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0절에서는 사람들이 그에게 재앙이 닥친 날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한 사람의 이름과 가문은 사라지지만, 그의 멸망이 남긴 충격이나 경고는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은 한 인격체로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파멸의 사례로만 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운명을 보고 두려워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빌닷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의 집은 결국 이렇게 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처지는 이렇게 되는 거야.」욥기 18:21 · 두루새김
이 마지막 절은 앞에서 묘사한 모든 재앙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관계와 삶의 태도를 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빌닷은 악한 삶을 살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의 마지막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 18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악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제 자체가 아닙니다. 그 원칙을 지금 욥에게 적용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올바른 원칙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적용할 대상에 관한 판단이 틀리면 어떻게 되는가?
빌닷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운명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욥을 어떻게 평가하셨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독자는 이야기의 처음에서 하나님께서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 인정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1:8; 2:3).
빌닷의 마지막 선언과 욥기에 제시된 하나님의 평가는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바로 이 충돌이 18장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두 낱말은 각각 뒤에 오는 사람들과 앞서 있는 사람들을 뜻할 수 있어, 후대와 이전 세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히브리어에서 앞과 뒤를 가리키는 말들은 지리적 방향과도 연결됩니다. 동쪽을 앞쪽으로 삼는 방향 감각에 따라 두루새김은 「서쪽 사람들」과 「동쪽 사람들」로 옮겼습니다. 21절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 관련하여, 예레미야 22:15–16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의 권리를 지켜 주는 일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신학적 판단 자체에는 구약의 다른 본문들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시편 37편이나 잠언의 여러 구절도 악한 사람의 번영이 영원하지 않으며 악한 행동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꺼진 등불 앞에서
욥기 18장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악한 사람의 파멸을 집요하게 묘사합니다. 빌닷은 그 모든 장면을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문제는 빌닷이 하나님을 너무 강하게 믿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구체적인 사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자신이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원칙도 잘못된 상황에 적용되면 거짓된 판단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욥기 18장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악한 사람의 운명에 관해 긴 연설을 하는 사람은 빌닷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모든 문장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판결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빌닷의 모든 문장을 가치 없는 거짓이라고 처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은 인간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마음대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는 것과 자신의 판단이 곧 하나님의 판단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나 욥기의 독자는 빌닷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빌닷이 악한 사람의 운명이라고 묘사한 많은 일이 이미 욥에게 일어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을 그런 악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연설이 끝나도 욥에게 새로운 설명이나 위로가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욥은 자신의 병든 몸과 무너진 집안과 끊어진 미래가 악한 사람의 운명이라는 말로 다시 묘사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빌닷이 그린 천막에는 불이 꺼져 있습니다.
그는 그 어둠을 보고 그곳에 살던 사람이 악한 사람이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욥기의 독자는 알고 있습니다.
등불이 꺼졌다는 사실만으로, 그 집에 살던 사람의 진실까지 밝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