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풀어 읽기 · 38장
이 장의 자리 · 38–41장 · 폭풍 속의 대답
고난의 설명 대신 창조를 보여 주신 하나님
욥은 오랫동안 하나님께 대답을 요구했습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려 달라고 했고,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적처럼 대하시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폭풍 속에서 욥에게 대답하셨습니다」(38:1). 욥이 기다리던 순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첫 말씀은 예상과 전혀 다릅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이 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38:4) 하고, 그가 세상이 창조될 때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십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십니까?
단순히 욥은 아무것도 모르니 입을 다물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욥이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어떤 사실을 보게 하시려는 것일까요?
땅의 기초를 놓는 건축자의 모습으로 시작하여, 갓 태어난 바다를 돌보는 부모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새벽을 움직여 악한 사람들을 털어 내고,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에 비를 내리십니다. 별들의 움직임을 다스리시는 분이 마지막에는 굶주린 까마귀 새끼들의 부르짖음까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단순히 인간이 얼마나 작은가가 아니라, 인간이 알고 있는 세계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얼마나 넓고 깊은가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나타나셨지만, 욥이 가장 궁금해하는 고난의 직접적인 원인은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욥이 요구한 사건의 해명과 다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욥의 고통과 관계없는 말씀도 아닙니다. 38장의 질문들은 욥이 자신과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이끕니다.
그 변화는 하나님의 첫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왜 욥에게 대답 대신 질문을 하시는가?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여 나의 뜻을 흐리는 이가 누구냐?」욥기 38:2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 처음 지적하시는 것은 욥이 겪는 고통도, 그가 저지른 특정한 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흐리는 말입니다.
여기서 「뜻」은 계획이나 의도, 깊이 생각하여 정한 방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히 욥이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지적보다 깊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담긴 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설명하고 판단하려는 말이 오히려 그 뜻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친구들과 논쟁하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끊임없이 문제 삼았습니다. 자신의 결백을 확신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대하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당하게 공격하시는 것처럼 말하기도 했습니다(욥 16:12–14; 19:6–7).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시는 것은 이러한 말에 담긴 지식의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고통스러워했다는 사실을 죄라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욥이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죄인으로 몰지도 않으십니다. 욥이 하나님의 행동에 관하여 말할 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영역까지 판단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자, 용사처럼 허리띠를 단단히 매어라. 내가 물을 테니, 네가 대답해 보아라.」욥기 38:3 · 두루새김
「허리띠를 단단히 매어라」는 말은 행동할 준비를 갖추라는 고대의 관용 표현입니다. 긴 옷을 입던 사람은 일하거나 달리거나 싸우기 전에 허리 부분의 옷자락을 묶어 움직이기 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만남이 시작되므로 정신을 차리고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법정의 상황이 뒤집히는 변화가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밝히기를 원했습니다. 욥기 23장 4절에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차례로 설명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실제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지만, 질문하는 분은 욥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욥이 하나님께 대답을 요구하던 위치에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대답을 요구하시는 위치로 상황이 바뀝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욥의 질문을 짓누르시는 장면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실제로 질문들을 제시하십니다. 그 질문에는 각각 욥이 살펴보아야 할 세계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단순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그 한계를 깨달을 수 있도록 욥이 보지 못했던 세계를 하나씩 보여 주십니다.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하나님의 첫 질문은 시간의 시작을 향합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알고 깨달은 것이 있다면 말해 보아라.」욥기 38:4 · 두루새김
욥은 세상이 이미 존재하는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땅을 밟고 살았고, 자신의 재산을 관리했으며, 자녀를 길렀습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세상 자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자신의 경험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바로 그 차이입니다.
이어지는 질문들은 땅을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처럼 묘사합니다.
「누가 땅의 크기를 정했느냐? 너는 알겠지. 누가 그 위에 길이를 재는 줄을 펼쳤느냐?」욥기 38:5 · 두루새김
「땅의 받침들은 무엇 위에 박혀 있느냐? 누가 땅의 모퉁잇돌을 놓았느냐?」욥기 38:6 · 두루새김
크기를 정하고, 길이를 재는 줄을 펼치며, 건물의 받침을 세우고, 모퉁잇돌을 놓습니다. 모퉁잇돌은 건물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돌입니다. 건축자는 그것을 기준으로 건물의 위치와 방향을 잡습니다.
욥이 실제로 땅의 밑바닥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질문은 단순한 지리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땅이 존재하기 전에 그 크기와 질서를 정할 수 있는 분이 누구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여기서 건축의 말들은 세계가 우연히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를 가진 장소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갑자기 장면이 바뀝니다.
「그때 아침 별들이 함께 기뻐 노래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두 환성을 올렸다.」욥기 38:7 · 두루새김
건축 현장에 노랫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아침 별들은 사람처럼 노래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하늘의 존재들은 창조의 광경을 보며 기뻐합니다.
욥이 자신의 고통을 설명하려 하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는 기쁨과 환호의 대상이었습니다.
이 말이 욥의 고통을 가볍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욥은 3장에서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그날에 빛이 비치지 않기를 바랐고, 자신의 출생 자체가 없었더라면 좋았겠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시작되던 때의 기쁨을 보여 주십니다.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지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이 태어나기도 전에 시작된 세계, 욥의 고통만으로 뜻이 정해지지 않는 창조 세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살아 있으니 감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욥의 경험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이 세계 전체의 의미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창조의 기쁨을 보여 주신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훨씬 거칠고 위협적인 존재를 등장시키십니다.
바다입니다.
바다를 가두신 하나님은 왜 바다를 아기처럼 감싸셨는가?
「바다가 어머니 배 속에서 터져 나오듯 솟아 나올 때, 누가 문을 닫아 그것을 가두었느냐?」욥기 38:8 · 두루새김
바다는 구약의 시에서 종종 인간이 다스릴 수 없는 위협적인 힘으로 묘사됩니다. 거센 물결은 해안을 무너뜨리고, 폭풍 속의 바다는 배를 삼킬 수 있습니다. 시편 89편 9절에서도 하나님은 바다의 거친 물결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찬양받으십니다.
그런데 욥기 38장에서는 바다가 어머니 배 속에서 터져 나오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마치 갓 태어나는 아이와 같습니다.
「그때 나는 구름으로 바다를 입히고, 짙은 구름으로 아기를 감싸듯 둘러 주었다.」욥기 38:9 · 두루새김
고대에도 갓 태어난 아이를 천으로 감싸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에스겔 16장 4절에서도 갓 태어난 아이를 씻기고 천으로 감싸는 행동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바다를 가두시는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갓 태어난 아이에게 옷을 입히시는 보호자처럼 그려지십니다.
우리는 바다를 문으로 가두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위험한 힘을 누르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감싸는 모습은 같은 행동을 돌봄의 관점에서도 보게 합니다.
그렇다면 바다는 하나님의 적입니까,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피조물입니까?
이 본문에서는 바다를 단순한 악의 상징으로만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바다는 자기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거대한 힘을 지녔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보시고 옷을 입히시는 피조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바다를 없애지 않으십니다. 바다가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정해 주십니다.
「나는 바다에 경계를 정해 놓고, 빗장과 문을 달았다.」욥기 38:10 · 두루새김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여기까지만 오고 더는 넘어오지 마라. 네 거만한 물결은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욥기 38:11 · 두루새김
바다에게도 한계가 있습니다.
본문의 「거만한 물결」은 바다의 물결을 거만하게 행동하는 존재처럼 그린 표현입니다. 거대한 파도가 자기 앞의 모든 것을 삼킬 듯 밀려오지만, 하나님의 명령 앞에는 멈추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아이를 감싸고 보호합니다. 동시에 아이가 위험한 곳으로 가지 않도록 울타리와 경계를 마련합니다. 욥기 38장의 하나님도 바다가 존재할 수 있도록 돌보시며, 바다가 끝없이 뻗어 나가지 못하도록 경계를 두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다스림은 힘을 파괴하는 일만이 아니라, 힘이 제자리를 가지도록 경계를 정하시는 일입니다.
이 장면은 욥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욥은 자기 삶에 닥친 고통이 아무런 경계도 없이 밀려오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의 가족과 재산과 건강은 차례로 무너졌고, 그는 그 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은 거센 바다조차 자신의 다스림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께서 욥의 고난에도 정확히 어떤 경계를 정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다를 다스리신다는 사실과 욥에게 일어난 각각의 사건이 왜 허용되었는지는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은 아직 욥에게 그 이유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눈앞에 무서운 바다와 그 바다를 아기처럼 감싸시는 하나님을 함께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장 9–10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물이 한곳으로 모이게 하시고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문학적 표현을 사용하지만, 물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새벽은 왜 악한 사람들을 털어 내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제 바다에서 새벽으로 시선을 옮기십니다.
「너는 살아오면서 아침에게 명령하거나, 새벽에게 나올 자리를 알려 준 적이 있느냐?」욥기 38:12 · 두루새김
욥은 아침이 오는 것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아침에게 명령하여 해가 떠오르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새벽을 단순히 밤이 끝나는 시점으로 묘사하지 않으십니다.
「새벽이 땅의 가장자리를 붙들고, 거기서 악한 사람들을 털어 내게 한 적이 있느냐?」욥기 38:13 · 두루새김
땅 자체가 흔들리는 천처럼 묘사됩니다. 새벽이 찾아오면 그 천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흔들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악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마치 먼지가 묻은 천을 붙잡고 흔드는 장면과 같습니다.
욥은 24장에서 어둠을 이용하는 악한 사람들을 묘사했습니다. 살인자는 새벽 무렵 일어나 가난한 사람을 죽이고, 간음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시간에 움직이며, 도둑은 밤에 집을 뚫고 들어갑니다(욥 24:13–17). 그곳에서 어둠은 악한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감추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38장에서는 새벽이 그 어둠을 걷어 내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땅은 도장에 눌린 진흙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그 위의 모든 것이 옷처럼 펼쳐져 보인다.」욥기 38:14 · 두루새김
고대 근동에서는 도장을 사용하여 진흙에 표시를 남겼습니다. 아직 부드러운 진흙 위에 도장을 누르면 무늬와 글자의 모양이 드러납니다. 밤에는 산과 골짜기, 들과 길의 경계가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벽빛이 퍼지면 땅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마치 도장이 눌린 진흙에 무늬가 나타나는 것처럼, 빛이 비치는 순간 세계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새벽이 단순히 어둠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분간하기 어려웠던 모습과 행동을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빛을 빼앗기고, 높이 치켜든 팔은 부러진다.」욥기 38:15 · 두루새김
악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빛」을 빼앗긴다는 표현은 역설적입니다. 여기서는 악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활동에 유리하게 사용하던 어둠을 그들의 「빛」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밤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새벽이 오면 그들의 행동이 드러나고, 폭력을 쓰려고 높이 치켜든 팔이 부러집니다.
이는 매일 아침 모든 악이 실제로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벽이 가져오는 빛을 통해 악을 드러내고 억누르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시적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욥은 악한 사람들이 잘살고 의로운 사람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계속 문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첫 연설에서 악한 사람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의 모습 속에서 악을 드러내고 억누르시는 자신의 활동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한 사람이 왜 지금 당장 심판받지 않는지에 대한 완전한 해명은 아닙니다. 욥이 질문한 것은 현실에서 악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잘살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욥 21:7–13).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 모든 사례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욥이 직접 명령할 수 없는 새벽조차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새벽은 인간의 명령 없이 찾아오지만, 그것이 가져오는 빛은 인간의 행동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세상의 정의를 모두 판단하려 한다면, 그 정의가 이루어지는 창조 세계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고.
조금 더 깊이
14절의 「옷처럼」이라는 비유에서 원문은 옷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여러 대상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그 위의 모든 것」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15절의 역설은 욥기 24장 17절과도 이어집니다. 거기서도 악한 사람들은 아침을 깊은 어둠처럼 여기며, 어둠에 익숙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네가 가 보지 못한 곳에도 나의 통치는 미친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욥의 시선을 인간이 직접 가 볼 수 없는 곳으로 이끄십니다.
「너는 바다의 샘들까지 가 보았느냐? 깊은 바다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욥기 38:16 · 두루새김
「바다의 샘들」은 물이 솟아나는 근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깊은 바다 밑바닥」은 인간이 쉽게 내려갈 수 없는 세계입니다. 욥은 바다를 볼 수 있고 그 위를 오가는 배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의 가장 깊은 곳을 직접 걸어 본 적은 없습니다.
「죽음의 문이 네 앞에 드러난 적이 있느냐? 죽음의 그늘로 들어가는 문을 보았느냐?」욥기 38:17 · 두루새김
바다의 깊은 곳에서 죽음의 문으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고대 히브리 시에서 죽음과 스올은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는 영역으로 그려지곤 합니다(욥 10:21–22; 시 9:13).
욥은 앞서 죽음에 관하여 많은 말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탄식했고, 죽음이 자신에게 안식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욥 3:11–1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죽음의 문을 직접 보았느냐고 물으십니다.
욥은 죽음을 바랐고 죽음에 관하여 깊이 생각했지만, 죽음이라는 영역 전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너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헤아려 보았느냐?」(38:18) 하고 땅 전체가 얼마나 넓은지 바라보게 하십니다. 땅 위에서 시작한 질문이 바다의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가, 인간이 알지 못하는 죽음의 영역을 지나, 다시 온 땅의 넓이로 펼쳐집니다.
그런데 다음 질문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과도 관련됩니다.
「빛이 사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어둠이 머무는 곳은 어디냐?」욥기 38:19 · 두루새김
「네가 빛과 어둠을 저마다의 자리로 데려갈 수 있느냐? 그것들이 사는 집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욥기 38:20 · 두루새김
아침이 되면 빛이 찾아오고, 밤이 되면 어둠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빛이 어디에서 출발하고 어둠이 어디로 돌아가는지 욥은 알지 못합니다. 이는 빛과 어둠에 실제로 사는 집이 있다는 과학적 설명이 아닙니다. 낮과 밤이 반복되는 질서를 인간에게 익숙한 집과 길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에서 갑자기 말투가 달라집니다.
「너는 알겠지. 그때 이미 태어났고, 살아온 날도 그토록 많으니 말이다!」욥기 38:21 · 두루새김
분명한 반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창조의 시작을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을 드러내십니다. 인간의 지식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경험한 공간에 따라 제한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욥의 경험은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세계 전체에 관한 완전한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고통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욥이 억울함을 느끼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욥이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하나님의 다스림 전체에 관한 결론을 내리려 할 때, 그 결론이 인간의 지식 범위를 넘어서는지를 질문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범위 밖에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보여 주십니다.
인간이 아무도 살지 않는 곳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광야에 왜 비를 내리시는가?
하나님께서는 먼저 눈과 우박의 창고를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쌓아 둔 창고에 들어가 보았느냐? 우박을 쌓아 둔 창고를 보았느냐?」욥기 38:22 · 두루새김
「그것들은 내가 재앙의 때를 위해, 싸움과 전쟁이 벌어지는 날을 위해 남겨 둔 것이다.」욥기 38:23 · 두루새김
사람은 곡식을 창고에 쌓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눈과 우박까지 그러한 방식으로 다스리시는 분처럼 그려지십니다. 특히 우박은 심판과 전쟁에 사용될 수 있는 자연의 힘입니다. 여호수아 10장 1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큰 우박을 내리셔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눈과 우박을 전쟁의 때를 위해 남겨 두셨다는 말은, 실제로 내리는 모든 우박이 누군가의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연 세계의 힘을 사람이 알지 못하는 방식과 때에 사용하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빛과 바람, 물길과 번개의 길을 물으십니다. 그런데 「누가 쏟아지는 빗물에 물길을 파 주고, 천둥과 함께 치는 번개에 길을 내주었느냐?」(38:25)라는 질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아무도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려고 말이다.」욥기 38:26 · 두루새김
「황폐하고 메마른 땅을 흠뻑 적시고, 새 풀이 돋아나게 하려고 말이다.」욥기 38:27 · 두루새김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 땅에도 비를 내리십니다.
그곳에는 농부가 없습니다.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마을도 없습니다. 곡식을 거두어 시장에 내놓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도 물길을 내시고 비를 내리십니다.
왜 그러십니까?
황폐하고 메마른 땅을 흠뻑 적시고 새 풀이 돋아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거의 모든 일을 사람이 의롭게 살았는지 죄를 지었는지에 따른 보상과 처벌이라는 틀에서 설명하려 했습니다. 엘리후는 그보다 넓은 설명을 내놓으면서도, 욥의 고난이 그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인지에 계속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사람이 살지도 않는 광야를 보여 주십니다. 그곳에는 하나님께 순종해서 보상받을 사람도 없고, 죄를 지어서 벌받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도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사람에게 보상하거나 벌을 내리는 일보다 훨씬 넓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삶에 무관심하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장소까지 돌보신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그 땅을 일구지 않고, 그곳의 풀이 자라는 것을 보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 비를 내리십니다.
사람이 어떤 사건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이나 손해를 발견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건에 하나님의 뜻이 전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을 사람이 모두 알아냈다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욥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세상은 사람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넓지만, 그 넓은 세계에서도 하나님은 생명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이 돌봄이 다시 생명이 태어나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비에게 아버지가 있느냐? 누가 이슬방울들을 낳았느냐?」욥기 38:28 · 두루새김
「얼음은 누구의 배 속에서 나왔느냐? 하늘에서 내리는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욥기 38:29 · 두루새김
앞에서는 바다가 어머니 배 속에서 터져 나오듯 솟아 나왔고 하나님께서 아기를 감싸듯 둘러 주셨습니다. 이제는 비와 이슬, 얼음과 서리가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물으십니다. 자연 현상이 단순한 물질의 이동이 아니라, 마치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그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30절에서는 「물은 돌처럼 굳어지고」 흐르던 물이 돌처럼 단단해집니다. 바다에서는 거센 물결이 되고, 광야에서는 생명을 살리는 비가 되며, 하늘에서는 이슬이 되고, 추위 속에서는 얼음과 서리가 됩니다.
바다는 경계를 얻고, 광야는 물을 얻으며, 얼음은 자신의 자리를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에는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생명을 위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땅과 물을 떠나 밤하늘의 별들로 시선을 옮기십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의 「빛은 어떤 길로 퍼져 나가느냐? 동쪽 바람은 어떤 길로 땅 위에 흩어지느냐?」에서 빛을 어떻게 이해할지는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빛이나 번개와 관련된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쪽 바람과 나란히 놓였다는 점에서는 하늘과 땅에서 움직이는 자연의 힘을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별들의 띠와 줄을 묶고 풀 수 있느냐?
「네가 키마의 띠를 묶을 수 있느냐? 크실의 줄을 풀 수 있느냐?」욥기 38:31 · 두루새김
「네가 마자로트를 제때에 이끌어 낼 수 있느냐? 아쉬와 그 새끼들을 이끌 수 있느냐?」욥기 38:32 · 두루새김
욥기 9장 9절에서도 키마와 크실과 아쉬가 언급됩니다. 그곳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별들을 만드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그 별들을 실제로 다스릴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묶고, 풀고, 이끌어 내고, 이끄십니다.
이 동사들은 마치 별들이 하나의 무리를 이루어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사람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고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별들이 나타나는 시간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너는 하늘의 법칙을 아느냐? 하늘이 땅을 다스리는 질서를 네가 세울 수 있느냐?」욥기 38:33 · 두루새김
하늘은 아무 질서 없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욥에게 물으시는 것은 그 질서를 살펴볼 수 있느냐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늘이 땅을 다스리는 질서를 세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늘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살펴보는 것과, 그 움직임을 정하고 유지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사람의 과학적 탐구가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살펴보는 사람과 세계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분의 위치를 혼동하는 데 있습니다.
욥은 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질서 전체를 자신의 명령 아래 둘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질문에서 하늘에 관한 이 이야기는 다시 욥 자신의 목소리로 내려옵니다.
조금 더 깊이
전통적으로 키마는 플레이아데스 성단, 크실은 오리온자리, 아쉬는 큰곰자리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고대 히브리어 별자리 이름과 현대 천문학의 별자리를 완전히 하나씩 짝지어 맞추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마자로트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이 별자리 이름들을 소리대로 옮겨 남긴 것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보존합니다.
네가 번개를 부르면 번개가 대답하느냐?
「네가 구름을 향해 소리쳐서, 쏟아지는 물이 너를 덮게 할 수 있느냐?」(38:34)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어 물으십니다.
「네가 번개들을 보내면 그것들이 달려가느냐? 네게 『저희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느냐?」욥기 38:35 · 두루새김
여기에는 욥기 전체의 대화와 맞닿는 인상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저희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대답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번개를 불러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번개는 사람의 명령을 따르는 하인이 아닙니다. 사람은 구름을 향해 큰소리로 명령한다고 해서 원하는 때에 비를 내리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욥이 하나님께 대답을 요구한 것 자체를 금지하는 말로 읽는 것은 지나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욥에게 대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본문은 하나님을 향해 말하는 것과 하나님께 명령하는 것을 구별하게 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들으시고 응답해 달라고 호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셔야 하는지를 자신이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말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신의 명령 아래 두는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지혜가 어디에서 오는지 물으십니다.
「누가 마음 깊은 곳에 지혜를 두었느냐? 누가 생각에 분별력을 주었느냐?」욥기 38:36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도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두루새김이 「마음 깊은 곳」과 「생각」으로 옮긴 두 낱말의 정확한 의미가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표현을 사람의 내면으로, 두 번째를 마음이나 분별하는 능력으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지혜를 주셨다는 뜻이 됩니다. 두루새김은 이 읽기를 따라 옮겼습니다. 반면 이 낱말들을 특정한 새나 자연 현상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전통도 있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자연 세계의 피조물에게 분별의 능력을 주신 분이 누구인지 묻는 질문이 됩니다.
어느 읽기를 택하든 앞뒤 흐름에서 하나님께서 지혜와 분별의 근원이시라는 방향은 분명하지만, 이 절이 정확히 어떤 대상의 지혜를 가리키는지까지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 지혜로 구름을 셀 수 있느냐? 누가 하늘의 물부대를 기울일 수 있느냐?」욥기 38:37 · 두루새김
「흙먼지가 단단한 덩어리로 굳고, 흙덩이들이 서로 달라붙을 때에 말이다.」욥기 38:38 · 두루새김
하늘의 구름들이 물을 담은 부대처럼 그려집니다. 누군가 그 물부대를 기울이면 땅으로 비가 쏟아집니다. 여기서 흙이 굳는 구체적인 과정을 원문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비와 흙의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나타나는 장면을 짧게 그립니다.
사람은 비를 맞을 수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구름을 셀 수 있으며 필요한 때에 하늘의 물부대를 기울일 수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는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는 사람이 알아 갈 수 있는 질서가 있습니다. 동시에 그 세계를 실제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다스림은 사람의 지식과 능력을 넘어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드넓은 하늘의 이야기에서 갑자기 아주 작은 생명들의 이야기로 내려오십니다.
사자와 까마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칠십인역은 36절을 여성들에게 베를 짜고 무늬를 놓는 기술을 가르치는 지혜에 관한 질문으로 옮깁니다. 히브리어 본문과 상당히 다른 표현이므로, 이 구절의 의미가 오래전부터 쉽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왜 굶주린 까마귀 새끼들을 말씀하시는가?
「네가 사자를 위해 먹잇감을 사냥하고, 젊은 사자들의 배를 채워 줄 수 있느냐?」욥기 38:39 · 두루새김
지금까지는 주로 땅과 바다, 빛과 어둠, 별과 구름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살아 있는 동물의 굶주림이 등장합니다.
사자는 강한 동물입니다. 다른 동물들을 사냥하여 먹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사자라도 언제나 먹잇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젊은 사자들은 배가 고프고, 굴속이나 덤불 속에서 사냥할 기회를 기다립니다(38:40).
이것은 창조 세계가 사람의 눈에 언제나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장소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세계에는 먹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여야 하는 동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자의 사냥 장면이 지나면 더욱 뜻밖의 동물이 등장합니다.
「누가 까마귀에게 먹이를 마련해 주느냐? 그 새끼들이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고 먹을 것이 없어 헤맬 때 말이다.」욥기 38:41 · 두루새김
사자는 강한 맹수입니다. 먹잇감을 사냥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까마귀 새끼들은 먹이를 스스로 충분히 마련할 수 없는 어린 생명들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까마귀 새끼들이 소리를 지른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고」 있다고 말합니다. 동물의 울음소리가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처럼 그려진 것입니다.
욥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아시고 대답하시기를 원했습니다. 욥기 30장 20절에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하나님께서 대답하지 않으신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런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제 까마귀 새끼들의 부르짖음을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은 사람에게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왕이나 부자나 의로운 사람뿐 아니라, 사람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는 야생동물의 생존까지도 창조주의 관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147편 9절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짐승들에게 먹이를 주시고, 부르짖는 까마귀 새끼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 새끼들의 부르짖음을 아신다면, 욥의 부르짖음은 어떠합니까?
본문은 이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욥은 자신이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욥에게 대답하시면서, 까마귀 새끼들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세계를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첫 대답은 욥에게 무엇을 알려 주었는가?
욥기 38장을 읽으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많은 질문을 하셨지만, 정작 욥이 알고 싶어 했던 사실은 설명하지 않으셨다는 점이 두드러집니다. 욥의 재앙이 왜 시작되었는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언제 고난이 끝날지도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욥이 그동안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수많은 일을 보여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돌보심이 나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욥의 고난에 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지혜롭게 다스리신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욥에게 왜 이런 고난이 닥쳤는지가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욥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고통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까? 더는 하나님께 질문해서는 안 됩니까?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고통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욥을 찾아와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욥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욥이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만으로 하나님의 모든 행동을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과, 하나님께서 각각의 사건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자신이 정확히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는 것과 그 지혜의 내용을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릅니다.
독자는 1–2장에서 욥이 알지 못했던 하늘의 장면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하늘의 장면을 알고 있는 독자조차도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뜻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욥이 모르는 것이 있고, 독자도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한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이해하지 못하신다고 단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까마귀 새끼들의 부르짖음은 욥에게 즉각적인 위로를 약속하는 말도 아니고, 모든 부르짖음이 곧바로 응답받는다는 보장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질문은 바다의 깊은 곳과 죽음의 문, 빛과 어둠이 오가는 길, 하늘의 별들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굶주린 까마귀 새끼들이 남습니다.
까마귀 새끼들은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을 낳아 준 부모가 언제 먹이를 가져올지도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아는 것은 지금 배가 고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먹이를 구하며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울음소리를 자신의 창조 세계에 관한 말씀의 마지막에 놓으십니다.
욥 역시 지금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자신을 이렇게 대하시는지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대답하기 시작하셨지만, 욥의 질문은 아직 모두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땅의 기초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질문은 그렇게 땅 위의 작은 울음소리에 이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