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12–26장 · 새 땅에서 지킬 규정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내쫓아서는 안 되는 사람
신명기 23장은 얼핏 서로 모순되는 듯한 두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모세는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야훼의 모임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라고 말합니다. 신체가 손상된 사람, 특정한 출생 신분을 가진 사람, 암몬과 모압의 후손에게 공동체 참여의 경계가 설정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제한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집니다.
그런데 조금 뒤에는 정반대 방향의 명령이 나옵니다.
「주인에게서 도망쳐 너희에게 온 종을 그 주인에게 넘겨주지 마라.」 그 종은 자기가 원하는 성읍에서, 자기가 좋게 여기는 곳을 골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누구도 그를 억눌러서는 안 됩니다.
도대체 이 공동체의 문은 누구에게 열려 있고, 누구에게 닫혀 있는 것일까요?
이 장에는 끊임없이 경계가 등장합니다. 혼인의 경계, 공동체의 경계, 군사 진영의 경계, 종의 주인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경계, 재산권의 경계가 차례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경계들이 모두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계는 사람을 제외하고, 어떤 경계는 사람을 보호합니다. 어떤 경계는 거룩함을 지키려 하고, 어떤 경계는 소유자의 권리를 제한하여 다른 사람이 살아갈 자리를 마련합니다.
신명기 23장을 읽는 핵심은 모든 규정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경계가 무엇을 지키고 누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살펴보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를 욕되게 하지 말라 — 침범해서는 안 되는 관계
23장은 아버지의 아내에 관한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남자는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아내로 맞아서는 안 된다. 아버지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여 아버지를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신명기 23:1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일반적인 성경 장절 구분에서는 신명기 22:30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내용상 앞 장의 혼인 규정과 직접 연결됩니다.
두루새김이 두 번째 명령을 이렇게 풀어 옮긴 자리는 원문에서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들추지 말라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아버지의 옷을 들어 올리는 행동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내와 성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아버지의 혼인 관계를 침범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레위기 18:8에서도 아버지의 아내와 성적 관계를 맺는 일이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내는 행위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이 금지에는 가족 안의 성적 질서뿐 아니라 권력에 관한 문제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6:21–22에서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잠자리를 같이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성적 질서를 어기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왕권에 도전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음을 드러내는 정치적 행동이었습니다.
신명기 23:1이 모든 경우에 그러한 권력 다툼을 염두에 두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혼인 관계를 침범하는 행위가 개인의 욕망을 넘어 가족의 질서와 권한을 침해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제 모세의 시선은 한 가족의 관계에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로 옮겨 갑니다.
여호와야훼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 소속의 경계가 남기는 질문
2–4절에는 같은 문장이 반복됩니다.
「고환이 으스러졌거나 성기가 잘린 남자는 여호와야훼의 모임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신명기 23:2 · 두루새김
「모임에 들어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호와야훼의 모임」은 단순히 어느 건물에 들어가는 문제보다, 여호와야훼께 속한 공동체에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자격의 문제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격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미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식 공동체 구성원으로 인정되는 문제인지, 공동체 안에서 혼인할 자격을 뜻하는지, 특정한 공적 모임이나 종교적 권리에 관한 것인지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곧바로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기도하는 일 자체가 금지되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아무런 실제적 제한이 없는 상징적인 표현이었다고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신체가 손상된 사람은 왜 제외되는가
본문은 그 사람의 잘못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신체의 상태만을 기준으로 모임 참여를 제한합니다.
레위기 21:17–23에는 신체에 특정한 결함이 있는 제사장이 제단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장도 거룩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두 규정은 정확히 같은 대상을 다루지 않습니다. 레위기는 제사장의 직무를 다루고, 신명기는 모임 참여를 다룹니다. 다만 두 본문 모두 고대 이스라엘의 거룩한 질서 안에서 신체적 온전함이 일정한 자격과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또한 왜 이런 조건이 모임 참여의 기준이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제한을 인간의 가치나 하나님의 사랑받을 자격에 관한 판단으로 확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 규정은 오늘날 장애를 지닌 사람의 존엄과 공동체 참여를 생각하는 독자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남깁니다.
맘제르는 누구인가
히브리어 맘제르(מַמְזֵר)는 특정한 출생 신분을 가리키지만, 구약 본문만으로 그 정확한 범위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금지된 성적 관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이해가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졌지만, 혼인하지 않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가 드물게 사용된다는 점도 해석을 어렵게 합니다. 스가랴 9:6에서도 이 단어가 등장하지만, 그곳에서는 아스돗에 살게 될 사람의 신분을 가리키므로 정확한 의미를 결정하기 쉽지 않습니다.
「맘제르는 여호와야훼의 모임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그의 십 대째 자손도 여호와야훼의 모임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신명기 23:3 · 두루새김
이것은 현대의 개인적 책임 개념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자손이 직접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출생과 혈통에 따라 공동체 참여가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그 제한을 명령하지만, 그 결과를 감당하는 자손들의 상황을 따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이 질문은 이어지는 암몬과 모압에 관한 규정에서 더욱 커집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9:10과 18:16에서는 이스라엘이 호렙산에서 하나님 앞에 모였던 날을 가리킬 때 「모임」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후대 유대교 전통에서는 혼인 자격과 관련하여 이해한 경우가 많지만, 본문 자체가 그 범위 전체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연결은 이사야 56:3–8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붙드는 고자들에게 아들과 딸보다 나은 이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여호와야훼께 속하여 그분을 섬기는 외국인들을 자신의 거룩한 산으로 데려오시고 기도의 집에서 기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이사야의 「고자」와 신명기의 고환이 으스러졌거나 성기가 잘린 남자가 모든 경우에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정확히 같은 부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의 표현에는 왕궁의 높은 관리처럼 맡은 일을 뜻하는 용법과 연결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신명기 23장에서 출생과 후손의 문제가 공동체 소속을 제한하는 기준이 되었다면, 이사야에서는 자손을 얻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사라지지 않을 이름이 약속됩니다. 이사야의 약속이 신명기의 모든 규정을 법적으로 어떻게 대신하는지까지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읽는 독자는 신명기의 경계 규정과 이사야의 따뜻한 맞이함에 관한 약속을 함께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느 한쪽을 없었던 것처럼 처리할 수 없습니다.
저주가 복으로 바뀐 사건 — 왜 암몬과 모압은 제외되는가
암몬과 모압의 후손에게 내려진 제한에는 앞선 두 규정과 달리 역사적 이유가 제시됩니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 그들이 길에서 빵과 물로 너희를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너희를 저주하도록 아람 나하라임의 프토르에서 브오르의 아들 발람이 고용되었기 때문이다.」신명기 23:5 · 두루새김
첫 번째는 도움을 주지 않은 행위이고, 두 번째는 적극적으로 해를 끼치려 한 행위입니다.
빵과 물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에게 빵과 물은 생존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단순히 먹을거리를 팔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길에서 빵과 물로 너희를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2:28–29에는 에돔과 모압이 먹을거리와 물을 돈을 받고 제공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따라서 23:5를 모압에서 어떠한 식량 거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으면 두 본문 사이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거래를 통해 물품을 제공하는 것과 지나가는 사람을 자발적으로 환대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신명기 23장은 그들의 대응에서 이스라엘을 맞이하고 돌보는 태도가 없었다는 점을 문제 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발람의 저주는 왜 실패했는가
민수기 22–24장에서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직접적인 위협으로 여기고, 저주를 통해 그들을 약화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는 발람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으셨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는 너희를 위해 그 저주를 복으로 바꾸셨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너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신명기 23:6 · 두루새김
이 장에서 여호와야훼의 사랑은 단순히 백성을 위로하는 감정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해로운 시도를 뒤집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신명기 7:7–8에서도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이유는 그들의 수가 많거나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됩니다.
그들의 평안을 위해 힘쓰지 말라는 말
7절에서 모세는 암몬과 모압의 평안과 그들이 잘되는 일을 위해 힘쓰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암몬과 모압 사람을 무조건 공격하거나 해쳐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명기 2:9과 2:19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모압과 암몬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을 괴롭히거나 그들과 싸우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땅을 침범해서는 안 되었지만, 동시에 그들과의 특별한 평화와 번영을 위해 적극적으로 힘쓰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 규정 역시 한 민족의 과거 행위를 그 후손들의 공동체 참여 자격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을 남깁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뜻밖의 대조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3:4는 모압 사람이 여호와야훼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다고 규정합니다. 그런데 룻기에는 모압 여인 룻이 등장합니다. 룻기 1:16에서 그는 나오미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룻기 4:13에서는 보아스의 아내가 됩니다. 룻기 4:17–22는 그에게서 태어난 자손의 계보가 다윗에게로 이어진다고 기록합니다. 모압 여자에게는 그 제한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후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또한 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그 백성과 하나가 된 사실이 중요하다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명기 23:4 자체는 남성과 여성을 분명히 구별하여 예외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룻기의 사례를 통해 신명기의 제한이 실제로 어떻게 이해되고 적용되었는지에 관한 질문이 생긴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룻기는 그 질문에 대한 법률적 해설서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압 여인 한 사람이 어떻게 믿음직하게 행동하고, 이스라엘의 가족 안으로 들어오고, 마침내 다윗의 조상이 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에돔과 이집트는 역겨워하지 말라 — 기억은 증오만을 남겨서는 안 된다
「에돔 사람을 역겨워하지 마라. 그들은 너희의 형제 민족이기 때문이다. 이집트 사람도 역겨워하지 마라. 너희가 그들의 땅에서 외국인으로 살았기 때문이다.」신명기 23:8 · 두루새김
창세기 25:25–26에서 에서는 야곱의 형으로 태어났고, 창세기 36:1은 에서가 에돔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에돔은 이스라엘과 혈연적으로 연결된 민족입니다.
그러나 이집트에 관한 명령은 훨씬 뜻밖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출애굽기는 이집트의 억압과 파라오의 폭력을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여기서 본문은 이집트의 억압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이집트 경험을 억압이라는 한 가지 기억으로만 정리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47:5–6에서 야곱의 가족은 파라오의 허락을 받아 이집트 땅에 정착했습니다. 훗날 그 땅에서 억압이 시작되지만,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간 역사 자체도 남아 있습니다.
암몬과 모압에게는 광야에서의 적대적 행위가 판단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에돔에게는 형제 민족이라는 관계가, 이집트에게는 과거에 그 땅에서 외국인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과거에 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그 민족 전체를 영원히 혐오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자손은 삼 대째부터 여호와야훼의 모임에 들어올 수 있다.」신명기 23:9 · 두루새김
이 장의 첫 부분에서 우리는 여호와야훼의 모임이 모두에게 무조건 열려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경계가 모든 외국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도 아님을 발견합니다.
전쟁터에서 오물을 덮으라 — 하나님이 거니시는 진영
10절에서 본문은 군사 진영으로 장소를 옮깁니다.
「너희가 군대를 이루어 원수들과 싸우러 나갈 때에는 온갖 나쁜 일을 삼가라.」신명기 23:10 · 두루새김
전쟁을 앞둔 군대에게 내려지는 명령이니 우상숭배나 폭력, 전쟁 범죄에 관한 규정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등장하는 것은 「밤에 몸에 생긴 일」로 정결하지 않게 된 사람과 볼일을 보는 장소에 관한 규정입니다. 원문에서 밤에 생긴 일은 정액을 흘린 일을 가리킵니다.
정결하지 않은 사람은 언제 돌아오는가
11절은 「밤에 몸에 생긴 일로 정결하지 않게 된 남자」가 진영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레위기 15:16–18에도 정액을 흘린 뒤 몸을 씻고 저녁까지 부정한 상태로 지내는 규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정함을 곧바로 도덕적 죄와 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신명기 23장은 그 사람이 잘못된 의도를 품었거나 죄를 지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정결의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에 일정한 절차를 따르도록 합니다.
「저녁이 가까워지면 그 사람은 물로 몸을 씻어야 한다. 해가 지면 진영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신명기 23:12 · 두루새김
앞에서 여호와야훼의 모임 참여가 여러 세대에 걸쳐 제한되는 규정이 있었다면, 여기서는 일시적인 부정함이 일정한 절차를 통해 해소됩니다. 이 두 종류의 제한을 같은 의미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전쟁터의 어디에 계시는가
13–14절에서는 군사 장비와 함께 땅을 파는 데 쓸 뾰족한 막대 하나를 갖추라고 명령합니다. 군인은 진영 밖에 정해진 자리로 나가 볼일을 보고, 그 막대로 땅을 파서 오물을 덮어야 합니다.
이 규정은 실제로 진영의 위생을 유지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 모여 생활하는 군사 진영에서 오물을 그대로 두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직접 제시하는 이유는 위생이 아닙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너희를 구하시고 원수들을 너희에게 넘겨주시려고 너희 진영 가운데를 거닐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진영은 거룩해야 한다. 그분께서 너희 가운데 수치스러운 것을 보시고 너희에게서 돌아서시는 일이 없게 하여라.」신명기 23:15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군대는 여호와야훼께서 함께하신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진영을 거룩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이 규정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하나님이 자동으로 보장해 주신다고 생각하는 태도에도 제동을 겁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께서 진영에서 수치스러운 것을 보시고 돌아서실 가능성까지 경고합니다.
적을 무찌르는 군사적 능력이 중요한 순간에도 모세는 가장 사적인 신체 활동까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전쟁의 승패만이 아니라 그 백성이 전쟁터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도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도망쳐 온 종을 돌려보내지 말라 — 소속보다 먼저 주어지는 보호
군사 진영의 거룩함에 관한 설명이 끝나자 갑자기 도망친 종이 등장합니다.
「주인에게서 도망쳐 너희에게 온 종을 그 주인에게 넘겨주지 마라.」신명기 23:16 · 두루새김
당시 종은 주인의 권한 아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종이 주인에게서 도망쳐 왔다면, 주인은 그를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종이 너희 성읍들 가운데 자기가 좋게 여기는 곳을 골라 너희와 함께 살게 하여라. 그를 억누르지 마라.」신명기 23:17 · 두루새김
누가 살 곳을 고르는가
살 곳을 고르는 사람은 주인도 아니고, 종을 받아들인 이스라엘 사람도 아닙니다.
도망쳐 온 종 자신입니다.
같은 장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문
2–4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는지를 정합니다. 그런데 16–17절에서는 도망쳐 온 종을 받아들이고 원하는 성읍에 살도록 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물론 「여호와야훼의 모임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과 「너희와 함께 살게 하여라」라는 명령이 가리키는 것은 동일한 법적 지위가 아닙니다. 따라서 두 규정이 직접적으로 모순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종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다시 붙잡혀 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신명기는 이 경우 그 장소를 허락하라고 명령합니다.
조금 더 깊이
외국의 주인에게서 도망쳐 이스라엘로 들어온 종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은 본문이 종에게 이스라엘의 성읍에서 살 권리를 부여한다는 점과 잘 어울립니다. 반면 본문은 그 종이 반드시 외국인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인에게서 도망쳐 온 종을 더 넓게 가리킨다고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또한 종이 도망친 이유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인의 학대를 피했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학대가 확인되어야만 보호받을 수 있다고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이 규정이 이스라엘의 종 제도 전체를 없앤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명기 15:12–18에는 여전히 종 제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경우에는 주인이 종을 되찾으려는 이해관계보다 도망쳐 온 사람을 보호하고 살 곳을 마련해 주는 일이 우선합니다.
매춘의 품삯을 하나님의 집에 가져오지 말라 — 제물이 정당성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18절의 두 용어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지는 논쟁이 있습니다. 종교의식과 관련된 성적 역할을 맡은 사람들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으며, 더 넓게 특정한 성적·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고대의 이른바 신전 매춘 관행을 떠올릴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 두 용어의 의미와 실제 역할을 모두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한 약속을 지키려고 바치는 것이라 해도, 여자가 몸을 팔아 번 돈이나 개를 팔아 받은 돈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집에 가져오지 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둘을 모두 역겨워하시기 때문이다.」신명기 23:19 · 두루새김
19절의 원문의 표현은 문자 그대로 개를 팔아 받은 돈을 가리킬 수도 있고, 특정한 남성을 깔보아 부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남성과 여성의 특정한 신분을 언급하기 때문에, 이 표현을 남성 매춘과 연결하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개」가 반드시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확정할 만큼 설명이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린다고 모든 것이 거룩해지는가
누군가가 하나님께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집에 무엇인가를 가져옵니다. 그런데 그 재물이 몸을 팔아 번 돈이나 본문에서 금지한 수입이라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행위가 그 재물이 생겨난 과정을 저절로 정당하게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재물을 드리는 행위에 주목하기 쉽습니다. 얼마를 바쳤는지, 얼마나 큰 희생을 했는지, 어떤 종교적 목적을 위해 사용했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재물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묻습니다.
이 점은 잠언 15:8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악인의 제사가 여호와야훼께 역겨운 것이며, 올바른 사람의 기도가 그분께 기쁨이 된다고 말합니다. 두 본문이 같은 사례를 다루지는 않지만, 종교적 행위가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의 삶과 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집에 어떤 돈을 가져올 수 있는지 이야기하던 본문이 이제 이웃에게 돈을 빌려줄 때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하는지를 다룹니다. 돈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순간뿐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 오가는 순간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동족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 — 재산을 늘릴 권리와 공동체의 의무
「동족에게 이자를 받지 마라. 은을 빌려주든 먹을 것을 빌려주든, 이자를 받을 수 있는 무엇을 빌려주든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된다.」신명기 23:20 · 두루새김
왜 동족에게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는가
출애굽기 22:25에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 때 이자를 요구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레위기 25:35–37에서는 동족이 가난해져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때 그를 도와야 하며,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 본문들을 함께 읽으면 이자 금지가 공동체 안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보호하는 일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빚은 반드시 사업을 늘리기 위한 투자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흉년이나 생계의 어려움으로 먹을거리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빌려야 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이자까지 요구하면 당장의 어려움이 더 큰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신명기 23장은 돈이나 물품을 빌리는 구체적인 목적을 제한하지 않지만, 동족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는 명령은 공동체 구성원의 어려움을 돈벌이의 기회로 삼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를 지닙니다.
그런데 왜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이자를 받아도 되는가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이자를 받아도 되지만, 동족에게는 받지 마라. 그러면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다.」신명기 23:21 · 두루새김
여기서 「다른 나라 사람」은 이스라엘 가운데 사는 외국인과 반드시 법적으로 같은 부류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모든 거주자에게 이자를 받아도 된다는 넓은 규정으로 받아들일 때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본문이 정하는 것은 동족과 다른 나라 사람 사이의 경제적 의무의 차이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현대 사회에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보편적인 금융 윤리와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규정을 오늘날의 은행 대출이나 국제 금융 거래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21절의 복의 약속은 가난한 동족에게 이자를 받지 않으면 언제나 그만큼의 재산이 되돌아온다는 계산법이 아닙니다. 사람은 이자를 받지 않으면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공동체의 경제생활을 자기 이익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여호와야훼께서 복을 주시는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이스라엘이 잘되어 가는 일은 각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 내는 방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동족을 향한 경제적 책임도 그 삶의 일부입니다.
서원하지 않아도 죄가 없다 — 자유롭게 한 약속이 의무가 되는 순간
22절은 하나님께 스스로 한 약속에 관한 규정으로 시작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 스스로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했으면, 그 약속을 지키는 일을 늦추지 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실 것이며, 늦추면 너희에게 죄가 될 것이다.」신명기 23:22 · 두루새김
서원이란 하나님께 무엇을 하거나 바치겠다고 약속하는 행위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람들은 중요한 상황에서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사무엘상 1:11에서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를 평생 여호와야훼께 드리겠다고 약속했고, 사무엘상 1:24–28에서는 아들을 데리고 실로로 올라가 그 약속을 지킵니다.
「그러나 그런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신명기 23:23 · 두루새김
모세는 모든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약속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런 약속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신앙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서원은 스스로 선택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일단 약속했다면 그 약속에 책임이 따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너희 입으로 한 말은 지켜서 그대로 실행하여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 스스로 약속하고 너희 입으로 말한 대로 하여라.」신명기 23:24 · 두루새김
「너희 입으로」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22절의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실 것」이라는 표현도 이 점을 강조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요구한다는 동사를 반복하여, 여호와야훼께서 그 약속을 지키라고 분명히 요구하신다는 뜻을 강하게 나타냅니다.
이 규정을 앞선 19절과 함께 읽으면 서원에 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원칙이 드러납니다. 하나는 잘못된 출처의 재물을 약속을 지킨다는 이유로 가져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한 정당한 약속을 가볍게 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규정은 종교적 열심보다 그 열심이 드러나는 방식과 책임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약속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 실제로 자신이 말한 것에 책임을 지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포도는 먹되 그릇에 담지 말라 — 이웃의 밭에 허락된 작은 자유
신명기 23장의 마지막에는 두 가지 농사 규정이 나옵니다.
「이웃의 포도밭에 들어가면 원하는 만큼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된다. 그러나 너희 그릇에 담지는 마라.」신명기 23:25 · 두루새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가면 손으로 이삭을 따도 된다. 그러나 그 밭의 곡식을 낫으로 베지는 마라.」신명기 23:26 · 두루새김
포도를 먹는 것과 담아 가는 것의 차이
포도를 그 자리에서 배불리 먹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당장 필요한 먹을거리를 채우는 행위입니다. 반면 포도를 그릇에 담는 것은 그 자리에서 먹는 것을 넘어 수확물을 자신의 소유로 가져가는 행위입니다. 본문은 앞의 행동을 허락하고 뒤의 행동을 금지합니다.
물론 어떤 이유로 그 사람이 포도밭에 들어갔는지, 반드시 가난한 사람이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의 포도를 먹을 수 있는지를 자세히 규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수확물을 제한 없이 이용할 권리가 주어졌다는 뜻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손과 낫의 차이
26절에서는 포도를 담는 그릇 대신 손과 낫이 대조됩니다.
손은 그 자리에서 필요한 양의 이삭을 따는 데 사용됩니다. 낫은 곡식을 수확하는 도구입니다. 본문은 이삭을 따는 행위를 허락하지만, 다른 사람의 곡식을 수확하는 행위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앞 절에서는 그릇이 경계였고, 여기서는 낫이 경계가 됩니다.
이웃의 재산을 존중한다는 것이 그 재산으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조금도 채워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이 곧 그 재산을 마음대로 가져갈 권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이삭 줍기와는 어떻게 다른가
신명기 24:19–22에서는 곡식을 수확한 뒤 밭에 남겨진 것과 올리브나무와 포도밭의 남은 수확물을 함께 사는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겨 두라고 명령합니다. 반면 23장의 규정은 아직 서 있는 곡식이 있는 밭과 포도밭에 들어가 그 자리에서 먹는 행위를 다룹니다.
둘 다 땅을 소유한 사람의 권리를 바탕에 둡니다. 그러나 그 소유권 때문에 다른 사람의 먹을 필요가 완전히 무시되지는 못하도록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마가복음 2:23–28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며 이삭을 땁니다. 이 장면은 신명기 23:26이 허락한 손으로 이삭을 따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논쟁의 초점은 남의 밭에서 이삭을 딴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행동이 안식일에 이루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다만 마가복음이 신명기 23장을 직접 인용하여 법적 의미를 해설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론 — 손으로 이삭을 따는 사람
마지막 두 절은 경계가 언제나 문을 닫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마지막 장면이 앞부분의 모든 어려운 규정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23장은 여전히 공동체에서 제외되는 사람들과 보호받는 사람들 사이의 긴장을 남깁니다.
이웃의 밭에 곡식이 익어 가고 있습니다.
그 밭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씨를 뿌리고 곡식을 길러 낸 사람도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밭에 들어옵니다.
그 사람은 손을 내밀어 이삭을 땁니다. 신명기의 법은 그 행동을 허락합니다.
하지만 그는 낫으로 곡식을 벨 수 없습니다. 손으로 이삭을 따는 것과 낫으로 곡식을 베는 것 사이에 경계가 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경계에는 두 사람의 삶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밭의 주인은 자기 곡식을 수확할 권리를 잃지 않습니다. 밭을 지나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한 사람의 소유가 인정되면서도, 다른 사람의 필요가 완전히 거절되지는 않습니다.
신명기 23장은 그렇게 끝납니다. 이웃의 밭에 서 있는 한 사람이, 낫이 아니라 자신의 손을 뻗어 이삭을 따는 장면으로.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