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2–25장 · 유다를 향한 경고
하나님의 집을 믿으면서 말씀을 거부하다
사람들이 성전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께 절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버렸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이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집을 찾아왔고, 그곳에서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 성전 문 앞에 예레미야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성전을 찾는 사람들에게 성전을 믿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실을 근거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거부하면서도 자신들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장소가 어느새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게 만드는 근거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레미야 6장에서 백성의 상처를 가리며 평안을 선언하던 종교적 언어가 비판받았다면, 7장에서는 그러한 거짓 확신이 어떻게 성전 자체와 연결되어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이 장은 장소를 따라 움직입니다. 성전 문 앞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의 거리로 나아가고, 마지막에는 성읍 밖 벤힌놈 골짜기로 향합니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의 거리로 돌아와 그곳에서 모든 기쁨의 소리가 그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성전 문에 서서 성전에 대한 믿음을 꾸짖다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구체적인 장소를 지정하십니다.
「여호와야훼의 성전 문에 서서 이 말을 외쳐라. 『여호와야훼께 절하려고 이 문들로 들어오는 모든 유다 사람아,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예레미야 7:2 · 두루새김
그들은 이미 성전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삶과 행동을 바로잡아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서 살게 하겠다.」예레미야 7:3 · 두루새김
이 말씀에서 「삶」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향을, 「행동」은 그 방향을 따라 실제로 행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마음속의 태도를 바꾸라는 요구가 아니라, 삶 전체를 바로잡으라는 명령입니다.
성전의 존재 자체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백성의 삶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의 성전이다, 여호와야훼의 성전이다, 이곳은 여호와야훼의 성전이다』라는 거짓말을 믿지 마라.」예레미야 7:4 · 두루새김
그런데 이 말 자체는 거짓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실제로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위해 세워진 장소였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은 성전을 바치면서 여호와야훼의 이름과 그곳에서 드리는 기도를 연결했습니다.
성전이 여호와야훼의 집이라는 사실로부터, 그 성전이 어떤 상황에서도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거짓입니다.
그들은 성전에 관한 참된 사실을 잘못된 확신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데 어떻게 자신이 지은 성전이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겠느냐고 고백했습니다(열왕기상 8:27).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고 백성과 관계를 맺으시는 장소였지만, 그렇다고 그 장소가 하나님보다 더 큰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삶과 행동을 참으로 바로잡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며,」 「너희 가운데 사는 외국인과 고아와 남편을 잃은 여자를 억누르지 않고,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너희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예레미야 7:5–6 · 두루새김
그들 가운데 사는 외국인과 고아와 남편을 잃은 여자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특별한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로 반복하여 언급됩니다. 땅과 친족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이들은 경제적으로나 법적으로 어려움에 놓이기 쉬웠습니다. 출애굽기 22:21–24와 신명기 24:17–22는 이들을 보호하는 일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중요한 의무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이미 언약 백성에게 요구하셨던 삶을 다시 일깨우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는 사람 사이의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일과 다른 신들을 따라가지 않는 일이 따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웃을 억누르면서 여호와야훼께 예배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언약의 충실함이 아닙니다.
또한 시편 15편은 누가 여호와야훼의 장막에 머물 수 있는지를 묻고, 올바르게 살아가며 진실을 말하고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7장의 성전 선포와 주제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게 삶을 바로잡을 때 여호와야훼는 백성을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 살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땅은 그들이 성전을 소유했기 때문에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는 재산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주셨고, 그분이 계속 살게 하시는 선물입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히브리어에서 두루새김의 「이곳은」에 해당하는 자리에 쓰인 헴마(hēmmâ)는 복수형으로, 「이것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여러 건물이나 시설을 가리키는지, 반복되는 성전 선언을 받는 표현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어도 핵심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성전의 존재를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증거로 삼습니다.
성전은 죄를 피하는 곳인가, 죄인이 숨는 곳인가
8절부터 예레미야의 말투가 달라집니다. 조건을 제시하던 말씀은 날카로운 고발로 바뀝니다.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한다. 바알에게 제물을 태워 바치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그러고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에 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라고 말하느냐? 그러고는 이 모든 역겨운 짓을 계속하려는 것이냐?」예레미야 7:9–10 · 두루새김
이 목록은 십계명의 여러 명령을 떠올리게 합니다(출애굽기 20:2–17). 죄를 지은 사람이 성전에 와서 용서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에도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씻어 달라고 구하는 제사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성전에 와서 하는 말입니다.
이들이 그 말로 정확히 어떤 구원을 주장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선언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성전에 나왔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을 고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듯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집에 들어와 그분 앞에 서는 행위가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심판을 막아 주리라고 믿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선언이 돌이킴의 감사가 아니라 죄를 계속 지어도 된다는 안심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 눈에는 강도들이 숨는 동굴로 보이느냐? 보아라, 나도 너희가 한 일을 보았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예레미야 7:11 · 두루새김
동굴은 강도들이 범죄를 저지른 뒤 숨어드는 곳일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성전 안에서 물건을 팔거나 훔치는 행위보다, 밖에서 악을 행하던 사람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와 안전하다고 여기는 태도에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집은 그분의 이름으로 불리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이 드러나야 할 장소입니다. 그런데 백성은 그 이름을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죄를 돌이키는 자리가 아니라 죄를 감추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전에 들어오면 안전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들이 성전 밖에서 저지른 일까지 모두 보고 계십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불리는 집 안에서는, 그 이름을 빌려 자신을 숨길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예레미야 7:11의 「강도들이 숨는 동굴」이라는 표현을 직접 인용하십니다(마가복음 11:17; 마태복음 21:13). 예수님의 행동에는 성전의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목적을 되찾으라는 요구와 당시 성전의 현실에 대한 심판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신약의 성전 사건은 새로운 역사적 상황을 다루므로 두 장면의 모든 세부를 동일하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실로의 기억 — 하나님이 계셨던 장소도 버림받을 수 있다
성전에 대한 확신을 깨뜨리기 위해 여호와야훼는 백성에게 뜻밖의 장소를 가리키십니다.
「실로에 있는 내 거처로 가 보아라. 내가 처음 내 이름을 머물게 한 곳이다. 내 백성 이스라엘이 저지른 악 때문에 내가 그곳에 무슨 일을 했는지 보아라.」예레미야 7:12 · 두루새김
여호수아 18:1에 따르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실로에 모여 회막을 세웠습니다. 사무엘상 1–3장에서도 실로는 엘리와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섬기고, 어린 사무엘이 여호와야훼 앞에서 자라던 성소의 장소로 등장합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를 전쟁터로 가져가면 블레셋에게 승리할 것처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언약궤는 빼앗겼고 이스라엘은 패배했습니다. 실로에서 섬기던 엘리의 두 아들이 죽고, 엘리 역시 그 소식을 듣고 죽습니다.
사무엘상 4장이 실로의 성소가 언제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직접 서술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시편 78:60은 여호와야훼께서 실로의 거처를 버리셨다고 돌아봅니다.
실로도 한때 여호와야훼의 이름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도 예배가 있었고 제사장이 있었으며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들이 실로의 안전을 영원히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내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 너희가 믿고 의지하는 그 성전과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에게 준 이곳에, 실로에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하겠다.」예레미야 7:14 · 두루새김
이 구절에서 「내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과 「너희가 믿고 의지하는 그 성전」이 같은 장소를 가리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은 참됩니다. 그러나 그 성전을 무조건적인 안전의 근거로 삼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머물게 하셨던 장소도 하나님 자신보다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15절에서는 그 경고가 성전에서 백성 자신에게로 확대됩니다.
「내가 너희 형제들 모두, 곧 에브라임의 모든 자손을 내 앞에서 쫓아냈듯이 너희도 쫓아내겠다.」예레미야 7:15 · 두루새김
에브라임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북왕국이 이미 멸망의 길을 걸었다는 역사는 남왕국 유다에 대한 경고가 됩니다. 유다는 자신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북왕국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야훼는 두 왕국 모두 같은 언약의 책임 아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단순히 예루살렘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근거로 삼던 성전 자체가 심판받을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대목은 예레미야 26장과도 연결됩니다. 그 장에도 성전과 실로를 연결하는 비슷한 예언이 나오며,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 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기록을 같은 연설이 서로 다르게 전해진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비슷한 경고가 반복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7장 자체는 이 선포의 정확한 연대를 밝히지 않으므로 두 사건이 같은 사건이라고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명령과 온 가족이 참여하는 우상 숭배
16절에서는 말씀이 갑자기 예레미야 자신을 향합니다.
「예레미야야, 너는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마라. 그들을 위해 부르짖거나 기도하지 말고 내게 간청하지 마라. 내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7:16 · 두루새김
예언자는 보통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금송아지 사건 이후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했고(출애굽기 32:11–14), 사무엘도 백성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자신의 중요한 책임으로 여겼습니다(사무엘상 12:23).
이 말씀을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 7:16은 지금 유다가 처한 특정한 상황에 대한 심판의 선언입니다. 비슷한 명령은 예레미야 11:14와 14:11에도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추상적인 죄목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직접 볼 수 있는 광경을 가리키십니다.
「아이들은 땔나무를 모으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고, 여자들은 반죽을 이긴다. 하늘의 여왕에게 바칠 과자를 만들고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부어 바쳐 나를 화나게 하려는 것이다.」예레미야 7:18 · 두루새김
빵을 굽거나 음식을 마련하는 평범한 집안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다른 신에게 바칠 제물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아버지들과 여자들이 각자의 역할을 맡아 참여합니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이 가족 전체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전에 와서 여호와야훼께 절합니다. 그러나 거리와 가정에서는 다른 신을 위해 제물을 준비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분을 저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절하면서 동시에 다른 신들에게도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분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예레미야 44:17–19를 보면, 훗날 일부 유다 사람들은 하늘의 여왕에게 제물을 바치던 때를 오히려 풍요롭고 안전했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러한 숭배를 단순한 반항 행위가 아니라 풍요로운 삶을 얻는 수단으로 여겼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냐?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해쳐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예레미야 7:19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는 우상 숭배 때문에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이 약해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생명과 복의 근원으로 믿어야 할 여호와야훼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의지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재앙을 가져옵니다.
20절에서 그 결과는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나무와 땅의 열매에까지 미칩니다. 이것은 신명기 28장이나 레위기 26장에 나타나는 언약의 심판과 연결됩니다. 백성이 살아가는 땅 전체가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한 재앙에 휩싸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백성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예언자의 기도를 막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경고를 받으면서도 계속해 온 배신에 대한 심판을 이제 더는 그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돌이키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위해 말하기 전에, 백성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바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하늘의 여왕」이 정확히 어떤 신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숭배되던 여성 신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슈타르나 아스타르테와의 관련성이 거론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7장은 그 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명령하지 않으셨는가
21절은 앞선 성전 비판을 한층 더 날카롭게 만듭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번제물까지 희생제물에 보태어 그 고기를 먹어라.」예레미야 7:21 · 두루새김
번제물은 제단에서 온전히 불살라 바치는 제물입니다(레위기 1:9, 13). 반면 다른 종류의 희생제물 가운데는 제물의 일부를 바친 뒤 제사장이나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레위기 7:15–18). 이는 제물의 거룩한 목적을 사실상 무시해도 좋다는 냉소적인 명령으로 읽힙니다. 「그렇게 제물을 많이 바쳐도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으니 너희가 먹기나 하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 나는 그들에게 번제물과 희생제물에 관해 말하지도 명령하지도 않았다.」예레미야 7:22 · 두루새김
모세오경에는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제사를 명령하신 내용이 분명히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20:24에는 제단과 희생제물에 관한 명령이 있고, 레위기 1–7장에는 다양한 제사의 규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단순히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라고 바꾸어 읽으면 본문의 강렬한 표현을 충분히 존중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실제로 「말하지도 명령하지도 않았다」는 부정형을 사용합니다.
첫째,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이라는 표현을 출애굽 사건의 결정적인 시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입니다. 둘째, 예레미야가 제사 규정을 아예 몰랐다는 뜻이 아니라, 언약의 본질을 강조하기 위해 강한 대조법을 사용했다고 읽는 것입니다. 셋째, 예언자의 선언과 모세오경에 기록된 제사 규정 사이에 실제로 관점의 긴장이 있다고 인정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예레미야 7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 강조하시는 내용 자체는 23절에 명확히 나타납니다.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것은 이것이었다. 『내 말을 들어라. 그러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너희가 잘되도록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길을 따라 걸어라.』」예레미야 7:23 · 두루새김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제사의 수량이나 규모로 정의하지 않으십니다.
언약의 중심은 이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받으시는 대상인 동시에 백성의 삶을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제물을 받으시는 분으로는 인정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명령하시는 분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지는 스스로 결정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는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읽기는 출애굽기 19:4–6의 언약 선언과 잘 연결됩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데려오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말씀을 듣고 언약을 지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이끌어 내던 날」을 출애굽 이후의 언약을 맺는 과정 전체를 포함하는 넓은 표현으로 읽는다면, 실제로 주어진 제사 명령과의 긴장은 여전히 남습니다. 둘째 읽기는 21절의 풍자적인 명령, 그리고 23절에 이어지는 설명과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명령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부정을 비교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셋째 읽기의 경우 서로 다른 본문들을 억지로 똑같은 표현으로 만들지 않고, 각 본문이 무엇을 강조하는지 살피게 됩니다.
하나님의 목소리 대신 자기 마음을 따라 걷다
23절의 「내 말을 들어라」라는 말씀 뒤에는 긴 불순종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자기 생각과 악한 마음의 고집을 따라갔다. 그들은 뒤로 물러갔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예레미야 7:24 · 두루새김
그들은 가만히 멈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따라 움직였고, 판단했고, 종교적인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관점에서 그 모든 움직임은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도 확신과 계획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방향이 여호와야훼께서 가라고 하신 길과 반대였다는 데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나는 내 종들인 모든 예언자를 너희에게 보냈다. 날마다 부지런히 거듭 보냈다.」예레미야 7:25 · 두루새김
13절에서도 여호와야훼는 「거듭거듭」 말씀하셨고 백성을 부르셨다고 하셨습니다. 원문에서는 13절과 25절 모두 히브리어의 「일찍 일어나다」(שָׁכַם)와 결합된 관용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반복되는 이 표현은 행동을 서둘러 부지런히 거듭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인간의 행동도 반복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고집을 세우며 자기 조상들보다 더 악하게 행동했다.」예레미야 7:26 · 두루새김
한쪽에는 지속적인 부르심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지속적인 거절이 있습니다.
두루새김이 「고집을 세우며」로 옮긴 자리에서 원문은 목을 뻣뻣하게 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는 멍에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짐승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32:9에서도 이스라엘은 목이 뻣뻣한 백성으로 묘사됩니다.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반드시 더 나은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랜 역사와 풍부한 종교적 경험을 지녔다고 해서 저절로 더 충실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역사가 여호와야훼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과정이 되지 못한다면, 오래된 불순종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뿐입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 말을 모두 전하고 그들을 불러라. 그래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도 않고 네게 대답하지도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7:27 · 두루새김
예언자의 역할은 반드시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맡기신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백성의 거절이 예상된다고 해서 예레미야의 선포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선포는 백성이 여호와야훼의 말씀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라. 『이 백성은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잘못을 고치라는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실함이 사라졌고 그들의 입에서 끊어졌다.』」예레미야 7:28 · 두루새김
여기서 「진실함」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믿는 태도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와의 관계에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입으로 여호와야훼의 성전을 거듭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야훼는 그들의 입에서 진실함이 사라졌다고 선언하십니다.
성전에 대한 말은 넘쳐 나지만, 그 말에 맞는 진실함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고, 성읍 밖에서 애가를 부르다
29절에서 예언의 분위기는 갑자기 장례식처럼 바뀝니다.
「『예루살렘아, 네 머리카락을 잘라 내던져라. 나무 없는 언덕에서 슬픈 노래를 불러라. 여호와야훼께서 노여움을 사는 이 세대를 물리치고 버리셨기 때문이다.』」예레미야 7:29 · 두루새김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애도의 표현입니다. 욥기 1:20에서 욥은 자녀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를 밀었습니다. 미가 1:16에서도 자녀들을 잃게 될 성읍을 향해 머리털을 밀며 슬퍼하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예레미야서에서 높은 언덕들은 우상 숭배의 장소와 연결되어 등장합니다(예레미야 3:2, 3:21). 백성이 다른 신들을 찾아다니던 장소에서 이제는 자신들의 상실을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버린 것은 유다 자손들이 내가 보기에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들은 내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에 자기들의 역겨운 것들을 들여놓아 성전을 더럽혔다.」예레미야 7:30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성전의 안전을 주장하던 4절과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은 그 건물이 여호와야훼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외쳤지만, 정작 그 성전 안에 여호와야훼께서 역겨워하시는 것들을 놓았습니다.
성전이라는 장소에 대한 확신과 그 성전에서 예배받으시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분리된 것입니다.
이제 예언의 시선은 성전에서 더 멀리 이동합니다.
「그들은 자기 아들들과 딸들을 불에 태우려고 벤힌놈 골짜기의 도벳에 제사터들을 지었다. 그런 일은 내가 명령하지 않았고 내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았다.」예레미야 7:31 · 두루새김
그러므로 예레미야 7:31은 실제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극단적인 종교 행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단순한 비유나 과장이라고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아들들과 딸들을 불에 태우는 행위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그런 일은 내가 명령하지 않았고 내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 표현은 인간이 어떤 종교적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그러한 행위가 여호와야훼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신명기 12:31에서도 다른 민족들이 자기 아들딸을 불살라 신들에게 바치는 행위는 여호와야훼께서 역겨워하시는 일로 언급됩니다.
종교적인 행위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값비싼 제물을 바치거나 극단적인 희생을 감행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와야훼께서는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는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하십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바치느냐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그분이 실제로 무엇을 명령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29절의 명령형은 히브리어로 여성 단수형입니다. 원문은 그 상대를 직접 이름 붙이지 않지만, 예루살렘이나 딸 시온으로 사람처럼 묘사된 공동체를 향한 명령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상대를 「예루살렘아」라고 밝혀 옮겼습니다. 그런데 원문에서는 단순히 머리카락이라는 말 대신 네제르(nēzer)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이 말은 왕관이나 거룩하게 구별됨의 표지를 가리킬 수도 있고, 민수기 6:7에서는 나실인의 구별된 머리털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표현에는 두 가지 이미지가 겹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나 영예의 표지를 잘라 버리며 슬퍼하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하게 구별된 지위의 상실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만으로 예루살렘이 문자 그대로 나실인의 서원을 한 공동체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벤힌놈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골짜기입니다. 도벳은 그곳에서 이루어지던 종교 의식과 관련된 장소의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열왕기하 23:10에 따르면 요시야는 사람들이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일을 막으려고 도벳을 더럽혔습니다. 예레미야 32:35에서는 벤힌놈 골짜기의 제사터와 자녀를 몰렉에게 바치는 행위가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22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출애굽 당시 제사를 명령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31절에서는 자녀를 불태우는 일은 명령하지도 않으셨으며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았다고 선언하십니다. 두 구절을 똑같은 의미로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22절에는 모세오경의 제사 규정과 관련된 해석상의 긴장이 있지만, 31절의 자녀 희생은 분명하게 금지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도벳은 살육의 골짜기가 되고, 예루살렘의 노래는 멈춘다
32절에서는 벤힌놈 골짜기의 이름이 바뀝니다.
「그러므로 보아라, 그날들이 온다. 나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사람들은 그곳을 더는 도벳이나 벤힌놈 골짜기라고 부르지 않고 죽임의 골짜기라고 부를 것이다. 묻을 자리가 없어 도벳에 시체를 묻게 될 것이다.」예레미야 7:32 · 두루새김
이름의 변화는 단순히 지명을 새롭게 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장소가 어떤 곳으로 기억될 것인지를 바꾸는 선언입니다. 특히 「묻을 자리가 없어」라는 말이 참혹합니다. 죽은 사람을 묻을 장소가 부족할 만큼 많은 사람이 죽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백성의 시체는 하늘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것들을 쫓아낼 사람도 없을 것이다.」예레미야 7:33 · 두루새김
시체가 땅의 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의 먹이가 된다는 말은 죽음 자체의 비극에 더하여 장례조차 치를 수 없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자녀를 희생시켰으니 똑같은 방식으로 벌을 받는다」는 단순한 보복의 공식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은 생명을 짓밟는 종교 의식과 수많은 사람이 죽는 장소가 되는 심판 사이에 의도적인 연결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7장은 이 무서운 장면에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절에서 시선은 다시 예루살렘의 성읍과 거리로 돌아옵니다.
「내가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운 소리와 기쁜 소리,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그치게 하겠다. 이 땅이 폐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예레미야 7:34 · 두루새김
특히 혼인 잔치의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공동체의 미래가 끊기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혼인은 단순히 두 사람의 개인적인 기쁨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족이 함께 축하하는 일이며, 다음 세대를 향한 기대를 담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런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 땅에서 평범한 삶을 이어 갈 수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죽은 사람을 제대로 장사 지내는 일은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신명기 28:26에도 이와 비슷한 언약의 심판이 등장합니다.
오늘, 성전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자기 삶을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살피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7장에서 여호와야훼는 백성에게 그저 성전을 떠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전 문 앞에서 그들의 삶과 행동을 바로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 문 앞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절하러 들어오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의 성전이다」라고 거듭 외쳤습니다.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 성읍의 미래를 전혀 다른 소리로 묘사하십니다.
즐거운 소리도, 기쁜 소리도, 신랑과 신부의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넘쳐났지만,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며 만들어 내던 기쁨의 소리까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집을 믿으면서 그 집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던 성읍. 예레미야 7장은 그 성읍의 마지막 모습을 무너지는 성벽보다 더 쓸쓸한 장면으로 남깁니다.
사람들이 기쁨을 나누던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더는 아무런 축하의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