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1–6장 · 밤에 본 환상들
집으로 들어오는 저주, 땅을 떠나는 악
성전을 다시 세운다고 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까지 저절로 새로워질까요?
스가랴 5장은 이 질문을 뜻밖의 두 환상으로 다룹니다.
앞 장에서 스룹바벨은 하나님의 영으로 성전을 완성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5장의 관심은 건축 현장을 떠나 사람들의 집과 일상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과, 그 땅에서 죄악을 없애는 일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나는 거대한 두루마리 — 숨을 곳 없이 다가오는 말씀
읽기 위한 두루마리가 날아다닌다
스가랴가 다시 눈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두루마리였습니다.
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보니, 두루마리 하나가 날고 있었습니다.스가랴 5:1 · 두루새김
두루마리는 고대 세계에서 글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반적인 수단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율법, 예언을 기록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두루마리에 예언을 기록했고(예레미야 36:2), 에스겔은 안팎에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보았습니다(에스겔 2:9–10).
그런데 스가랴가 보는 두루마리는 특이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단지 기록되어 있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사람들의 삶 속으로 움직여 들어간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환상의 이미지입니다. 스가랴는 두루마리가 날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정확한 크기를 대답합니다.
천사가 내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내가 대답했습니다. 「두루마리가 날고 있습니다. 길이는 스무 큐빗이고 너비는 열 큐빗입니다.」스가랴 5:2 · 두루새김
일반적인 문서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큰 두루마리입니다. 그것은 커다랗고, 움직이며, 온 땅을 향해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흥미롭게도 열왕기상 6:3은 솔로몬 성전 앞 주랑의 치수를 스무 큐빗과 열 큐빗으로 기록합니다. 스가랴가 본 두루마리의 길이와 너비가 그 치수에 맞아떨어집니다. 이 때문에 두루마리의 크기를 성전과 연결해 읽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거룩한 성전과 관련된 치수가 땅을 심판하는 말씀의 크기로 등장한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가랴는 이 치수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반드시 성전 주랑을 상징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도둑과 거짓 맹세하는 사람 — 하나님과 이웃을 함께 배신하는 삶
왜 하필 이 두 가지 죄인가
천사는 두루마리가 가져올 심판을 설명하면서 두 부류의 사람을 지목합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온 땅으로 나가는 저주다. 도둑질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저주에 따라 여기서 쓸려 나갈 것이다. 거짓으로 맹세하는 사람도 누구나 이 저주에 따라 여기서 쓸려 나갈 것이다.」스가랴 5:3 · 두루새김
하나님의 백성이 언약을 어겼을 때 그에 따른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신명기 28장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를 때 받을 복과, 언약을 어길 때 겪을 저주가 길게 제시됩니다. 스가랴의 두루마리는 이처럼 언약을 어긴 데 대한 심판의 전통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죄는 십계명의 내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20:15는 도둑질을 금하고, 20:7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일을 금합니다. 또한 레위기 19:11–12는 도둑질과 거짓말,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일을 가까이 연결하여 명령합니다.
도둑질은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는 행동입니다. 거짓 맹세는 진실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이름까지 이용하여 자기 말이 옳다고 내세우는 행동입니다. 한쪽은 이웃의 재산을 해치는 일이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관계를 해치는 일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맹세는 단순히 말이 참되다고 강조하는 표현만은 아니었습니다. 계약이나 다툼, 법적 판단과 관련된 상황에서 신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이 한 말이 참되다고 보증하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는 것은 거짓말에 종교적인 권위까지 덧씌우는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두루마리가 다루는 죄는 예배 의식의 잘못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거래하고, 약속하고, 소유를 나누며 살아가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문제 삼습니다.
두 가지는 언약을 깨뜨리는 삶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스가랴 7:9–10에서는 바른 재판을 하고 서로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스가랴 8:16–17에서는 이웃과 진실을 말하고 참되고 평화로운 재판을 하며, 거짓 맹세를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과 이웃을 대하는 삶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저주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4절에서 두루마리의 움직임은 더욱 구체적이 됩니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께서 선언하신다. 『내가 이 저주를 내보냈다. 그것은 도둑의 집과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갈 것이다. 그 집에 머물며, 집을 이루는 나무와 돌까지 모두 없애 버릴 것이다.』」스가랴 5:4 · 두루새김
집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외부의 위험을 피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보관하고, 가족과 함께 살며, 개인적인 생활을 하는 곳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훔친 물건을 감출 수도 있고, 거짓 맹세로 자기 행동이 옳다고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집 바깥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나무와 돌은 집을 이루는 재료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겉만 상하거나 잠시 불행을 겪는 것보다 훨씬 철저한 파괴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도둑질과 거짓 맹세가 개인의 사소한 잘못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탱해야 할 신뢰를 무너뜨리는 죄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다만 이 환상을 모든 재산 손실이나 집의 무너짐이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형벌이라는 뜻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구체적인 환상 속에서 언약을 어긴 데 대한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을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는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두루마리는 특정한 집단의 잘못만을 겨냥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구나」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따라서 이 환상은 다른 사람의 집을 향해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할 권한을 인간에게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제 다음 환상은 죄를 범한 개인의 집을 넘어, 그 땅에 존재하는 악 자체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스가랴 5장에서는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공동체의 깨끗함이 중심 문제이므로, 우선 그들이 사는 땅을 향한 심판으로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온 땅」이라는 표현 자체를 유다 지역으로만 한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성전이라는 특정 장소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영역으로 나아갑니다.
에바 그릇 — 평범한 거래 도구 안에 들어 있는 악
두루마리 다음에 나타난 그릇
천사는 다시 스가랴에게 눈을 들어 보라고 말합니다.
내가 물었습니다. 「저것은 무엇입니까?」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저것은 에바 그릇이다.」 그가 덧붙였습니다. 「이것은 온 땅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스가랴 5:6 · 두루새김
에바는 곡식 같은 마른 물품의 양을 재는 데 사용하던 고대 이스라엘의 부피 단위입니다. 여기서는 그 단위의 양을 담거나 재는 그릇을 가리킵니다.
고대 사회에서 곡식의 양을 재는 일은 사람들의 생계와 직접 관련되었습니다. 공정한 저울과 정확하게 양을 재는 일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였습니다.
레위기 19:35–36은 길이나 무게나 양을 잴 때 부정하게 하지 말고 공정한 도구와 기준을 사용하라고 명령합니다. 아모스 8:5에서는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는 상인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미가 6:10–11에서도 양을 속여 재는 일과 부정한 저울이 비판받습니다.
따라서 악을 담은 그릇이 하필 에바라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이 일상적인 경제활동에서 저지르던 불의를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스가랴 5장은 이 에바 그릇이 실제로 양을 속여 재는 데 사용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환상이 오직 거래에서 벌어지는 부정행위만을 상징한다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납덩이 아래에 있던 여자
그때 둥근 납덩이가 들려 올라갔습니다. 에바 그릇 안에는 여자 하나가 앉아 있었습니다.스가랴 5:7 · 두루새김
납은 무거운 금속입니다. 이 장면에서 납덩이는 그릇의 입구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악이라는 추상적인 현실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내는 환상입니다.
천사가 말했습니다. 「이 여자가 바로 악이다.」 그는 여자를 그릇 안으로 내던지고, 납덩이를 그릇 입구 위로 던져 덮었습니다.스가랴 5:8 · 두루새김
악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는 동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스가랴의 환상에서도 여자는 특정한 여성 개인이나 여성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악이라는 현실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낸 존재입니다.
왜 악을 즉시 없애 버리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앞 환상에서 도둑과 거짓 맹세하는 사람의 집을 모두 없애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악을 그릇에 담아 단단히 가둡니다. 두 번째 환상에서는 악이 그 땅에서 옮겨질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점에서 5장의 심판은 3장의 깨끗하게 하시는 약속과도 연결됩니다. 스가랴 3:9에서 하나님은 그 땅의 죄악을 하루 만에 없애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5장은 그 약속을 기계적으로 실행하는 절차를 설명하지는 않지만, 죄악을 없애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두 환상으로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사람들의 모습」으로 옮긴 원문의 표현은 에남으로,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눈’에 해당합니다. 히브리어 자음 본문의 읽기를 유지하면 그릇이 사람들의 모습이나 상태를 드러내는 상징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칠십인역을 비롯한 일부 고대 번역 전통에서는 이 부분을 ‘그들의 죄악’ 또는 ‘그들의 불의’에 해당하는 뜻으로 읽습니다. 어느 쪽이 원래 표현이었는지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천사가 그릇 안의 여자를 「악」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 환상 전체가 그 땅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리쉬아(רִשְׁעָה)입니다. 이 단어는 문법적으로 여성형 명사입니다. 따라서 악이 여자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을 여성이라는 성별 자체가 악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추상적인 개념을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잠언 8장에서는 지혜가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황새 날개를 가진 두 여자 — 악은 어디로 옮겨지는가
악을 옮기는 존재들도 여자다
스가랴가 다시 눈을 들자 이번에는 두 여자가 나타납니다.
내가 눈을 들어 보니, 두 여자가 날개에 바람을 받으며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황새의 날개 같은 날개가 있었습니다. 두 여자는 에바 그릇을 땅과 하늘 사이로 들어 올렸습니다.스가랴 5:9 · 두루새김
이 장면에서 악은 더 이상 땅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악은 옮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지가 밝혀져야 이 움직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와 이야기하던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여자들은 에바 그릇을 어디로 가져갑니까?」스가랴 5:10 · 두루새김
앞에서는 물체의 정체를 묻는 질문이 중심이었습니다.
이제는 목적지가 중요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황새는 큰 날개를 가진 새로, 먼 거리를 날아 이동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8:7에서도 황새가 정해진 이동 시기를 아는 새로 언급됩니다. 그러므로 황새의 날개라는 이미지는 두 여자가 무거운 에바 그릇을 먼 곳으로 옮기는 모습을 실감 나게 해 줍니다. 레위기 11:19에서 황새는 이스라엘이 먹어서는 안 되는 새들 가운데 포함됩니다. 그 때문에 황새 날개를 가진 두 여자 역시 부정한 존재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환상에서 그 여자들은 악을 퍼뜨리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이 담긴 그릇을 들어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따라서 황새가 먹기에 부정한 새라는 사실만으로 이 여자들의 성격까지 악하다고 판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들을 천사라고 부르지도 않고, 악한 영이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시날 땅에 세워질 집 — 악이 제자리로 돌아가는가
천사는 스가랴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시날 땅에 집을 지으러 가는 것이다. 집이 마련되면, 그릇은 그곳의 받침 위에 놓일 것이다.」스가랴 5:11 · 두루새김
시날이라는 지명은 이 환상을 이스라엘의 오랜 기억과 연결합니다.
왜 바벨론이라고 하지 않고 시날이라고 하는가
시날은 창세기에서 바벨론 지역과 관련되어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창세기 10:10에서는 바벨이 시날 땅에 있는 도시로 언급됩니다. 창세기 11:2에서는 사람들이 시날 땅의 평지를 발견하고 그곳에 정착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도시와 탑을 세우려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땅에 흩어지는 일을 면하려 했습니다(창세기 11:4).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란스럽게 하시고 그들을 흩으십니다. 시날은 이러한 성경의 기억 속에서 인간이 자기 힘으로 이름을 높이고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조직하려 했던 장소와 연결됩니다.
또한 다니엘 1:2에서는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 일부를 시날 땅으로 가져가 자기 신의 보물 창고에 두었다고 기록합니다.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서 그곳은 바벨론의 권세와 연결된 장소였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 바벨론으로 옮겨지는 악
유다 백성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성전 기물도 그곳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포로에서 돌아온 공동체를 향한 환상에서는 악이 시날 땅으로 옮겨집니다.
이것을 모든 악의 시작이 바벨론에 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 환상에서 도둑질과 거짓 맹세를 한 사람들은 유다 공동체 안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바 그릇의 이동은 유다 사람들이 본래 깨끗했고 악은 모두 외부 민족에게서 왔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땅에 실제로 있던 악이 제거되는 환상입니다.
악을 위한 집이 세워진다
본문은 악이 그 땅을 떠나 다른 곳에 놓이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악이 끝내 없어질지, 마지막에 어떻게 될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는 악이 유다 땅에서 제거되어 시날이라는 다른 장소에 자리 잡는다는 이해입니다. 이 경우 집은 악이 옮겨져 머물게 될 정해진 장소를 나타냅니다. 다른 하나는 악을 위한 집과 받침이 세워진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시날에서 악이 마치 섬김의 대상처럼 자리 잡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보여 준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집이 신전처럼 사용되고 받침이 종교 의식을 위해 무언가를 놓는 자리를 암시한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가랴 5장은 그곳에서 어떤 의식이 이루어지는지, 사람들이 악을 숭배하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악을 위한 신전이 실제로 세워질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본문을 넘어섭니다.
무너지는 집과 세워지는 집 — 두 환상이 서로를 해석하다
첫 번째 환상에서는 저주가 도둑과 거짓 맹세하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집의 나무와 돌을 모두 없애 버립니다. 두 번째 환상에서는 악을 담은 에바 그릇이 시날로 옮겨집니다. 그곳에서는 그릇을 위한 집이 세워지고, 그릇은 받침 위에 놓입니다.
한 집은 파괴되고, 다른 집은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집을 다시 세우는 일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백성의 집들이 불의와 거짓으로 채워져 있다면, 성전을 다시 세우는 것만으로 참된 회복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일인 동시에,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스가랴의 시선은 아직 하늘에 머물러 있습니다.
두 여자가 에바 그릇을 들어 올려 시날로 향하고 있습니다.
새로워질 땅을 뒤에 남겨 둔 채, 악을 담은 그릇이 그곳을 떠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