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3–6장 · 새 언약의 일꾼
마음을 넓히고 멍에를 벗기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마음을 넓히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서로 맞지 않는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마음을 넓히라는 말과 관계에 선을 그으라는 말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앞에서는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라고 하다가, 뒤에서는 특정한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사랑과 구별 사이에서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풀려면 6장의 첫 문장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부터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자신과 화해시키셨습니다. 바울은 앞 장에서 그 화해의 말씀을 맡은 사절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그것은 예상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사람은 고난을 겪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가난해집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은 공동체는 서로를 향해 마음을 넓혀야 하면서, 동시에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우상숭배에서는 분명히 떠나야 합니다.
이 장의 두 요청은 모두 하나의 질문으로 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무엇에 마음을 열고, 무엇에서 떠나야 하는지를 어떻게 바꾸는가요?
구원의 날은 왜 지금인가
우리는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십시오.고린도후서 6:1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을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함께 일하는 상대가 분명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사람들에게 권하신다고 말했으므로(5:20)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지만, 바울과 동역자들이 함께 일한다는 뜻이나 고린도 사람들과 협력한다는 뜻도 문법적으로 배제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바울이 혼자 구원을 이루는 사람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하는 일은 새로운 은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사람들의 삶에서 헛되지 않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도 있는가
은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인데, 바울은 그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헛되이」라는 말은 은혜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 은혜의 목적에 어긋나게 살아갈 가능성을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 15:10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 은혜로 사도가 되어 수고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화해의 길을 여셨는데,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거나 그 화해에 걸맞은 삶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울은 그런 모순을 경계합니다. 그렇다고 은혜를 받기 위해 충분한 업적을 쌓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순서가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삶이 요청됩니다.
이사야가 말한 구원의 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를 받아 주는 때에 네 말을 들어 주었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보십시오, 지금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 주시는 때입니다. 보십시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고린도후서 6:2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 49:8의 인용입니다. 이사야 49장에서 하나님의 종은 야곱의 지파들을 회복시키고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받고, 더 나아가 민족들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습니다(49:6). 49:8에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 종의 말을 들어주시고 그를 도우시며, 황폐해진 땅과 백성의 삶을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음 절에서는 갇힌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이어지며, 그 배경에는 유배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역사적 현실이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 약속을 자신의 시대에 적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으며, 예수님을 통한 화해의 말씀이 민족들에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사야가 바라보았던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인 현실이 되었다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인용문 뒤에 「지금」을 두 번 반복하는 자신의 말을 덧붙입니다. 이 반복은 결단을 서두르게 하는 표현만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가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알리는 선언입니다.
지금은 어떤 시간인가
이 구절을 흔히 죽기 전에 빨리 회개해야 한다는 경고로 읽습니다. 그런 적용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바울은 구원의 기회가 언제 완전히 끝나는지에 관한 시간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때가 예수님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은혜를 미래의 문제로 미루거나 이미 다 아는 이야기로 취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화해를 받아들이고, 그 화해가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도록 응답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사야의 말씀이 가진 본래의 긴장도 살아 있습니다. 고난이 사라졌기 때문에 구원의 날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고난 가운데 자신의 구원 행위를 시작하셨기 때문에 구원의 날이 선포되었습니다.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구원의 날이라고 부르는 지금은 고난이 끝난 시대가 아닙니다. 다음 절부터 바울은 자신이 겪은 어려움과 박해를 길게 이야기하며, 바로 그 고난 속에서 은혜의 섬김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줍니다.
사역의 진실은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우리는 어떤 일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맡은 섬김이 비난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6:3 · 두루새김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려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바로 뒤의 문장들과 충돌합니다. 바울은 8절에서 자신이 모욕을 받고 나쁜 평판을 듣는다고 말합니다. 그가 경계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 때문에 복음의 섬김이 정당하게 비난받을 빌미를 제공하는 일입니다.
복음이 사람들에게 거부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부정직함이나 부당한 행동 때문에 복음이 불신받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 둘을 구별합니다.
사도를 증명하는 첫 번째 증거는 견딤이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어려움과 고난과 막다른 처지에서도 꿋꿋이 견딥니다.고린도후서 6:4 · 두루새김
앞에서 바울은 추천서가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의 삶이 자신의 사역을 증언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또 다른 증거를 내놓습니다.
꿋꿋이 견디는 것입니다.
그는 얼마나 큰 권력을 행사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았는지를 먼저 말하지 않고, 그가 겪은 고난과 그 가운데서의 견딤을 말합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도덕 철학에서도 철학자나 도덕 교사가 자신의 삶과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어려움을 견딘 경험을 제시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고난을 참아 낸 영웅적인 인간의 강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복음을 섬기는 삶 안에서의 견딤입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소동을 겪을 때에도, 힘들게 일하고 밤을 새우고 굶주릴 때에도 견딥니다.고린도후서 6:5 · 두루새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것은 폭력과 강제로 자유를 빼앗기는 일입니다. 소동은 바울의 사역을 둘러싸고 공동체나 도시에서 발생한 혼란을 떠올리게 하고, 힘들게 일하고 밤을 새우고 굶주리는 것은 몸이 실제로 겪는 고통입니다.
바울은 나중에 11:23–27에서 이런 경험을 더욱 구체적으로 나열하는데, 그 목록과 비교하면 여기서 말하는 고난이 실제 사역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6장의 목적은 사건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록하는 데 있지 않고, 그 고난들을 견디는 사람에게서 무엇이 드러나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견딤만으로 충분한가
고통을 많이 겪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사역이 참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고난 자체가 사람의 진실함을 자동으로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바울도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6절부터 그는 고난을 겪는 동안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나타났는지를 설명합니다. 그가 얼마나 심하게 고생했는가에서, 그 고생 가운데 어떤 사람으로 살아갔는가로 시선이 옮겨 갑니다.
조금 더 깊이
5절의 「굶주릴 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네스테이아는 스스로 선택한 금식을 뜻할 수도 있고 음식을 먹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앞뒤의 고난 목록을 고려하면 음식을 충분히 얻지 못한 경험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모든 경우가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겪은 굶주림이었는지까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무엇을 손에 들고 있는가
우리는 깨끗한 삶과 지식, 오래 참음과 친절함,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고린도후서 6:6 · 두루새김
5절까지는 바울이 겪은 일들이 중심이었다면, 이제 그가 지닌 태도와 능력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사역자의 진실함을 고난의 양으로만 측정하지 않고, 고난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오래 참음과 친절함은 함께 놓인다
오래 참음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어려움에 대한 반응이고, 친절함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선한 행동입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견디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차갑고 매정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고난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견딤과 친절함을 함께 말합니다.
그가 견디는 목적이 단지 자기 생존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 태도는 「거짓 없는 사랑」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5:14와 맞닿아 있습니다. 바울을 몰아가는 힘은 예수님의 사랑이므로, 그 사랑에 붙들린 사역에서는 사람을 이용하거나 속이는 태도가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 드러나야 합니다.
6절에서 「성령」으로 옮긴 원문의 표현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거룩한 마음가짐이나 영적인 태도로 읽을 가능성도 논의됩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는 일로 설명해 온 문맥에서는 성령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좋은 성품을 하나님과 분리된 개인적 능력으로 과시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 안에서 이런 삶을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의의 무기는 무엇인가
7절에서는 언어가 바뀝니다.
진실한 말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섬기며, 오른손과 왼손에는 의의 무기를 듭니다.고린도후서 6:7 · 두루새김
갑자기 무기가 등장하고, 「오른손과 왼손」은 양손에 각각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의의 무기」라는 표현의 세부적인 의미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과 그 의를 섬기는 사역에 필요한 무장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바로 앞에서 나열한 것은 오래 참음, 친절함, 거짓 없는 사랑, 진실한 말,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기의 이미지를 실제 폭력이나 강압을 정당화하는 말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싸움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 맞닥뜨리는 저항과 거짓에 대항하는 일이며, 그가 손에 든 것은 자신의 권력을 확대할 무기가 아니라 진리와 의를 섬기기 위한 무기입니다.
바울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박해받는다고 해서 자신의 사역을 폭력적인 지배로 바꾸지 않습니다. 그는 진리와 사랑,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일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사람들에게 언제나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무기」에 해당하는 원문은 무기나 장비를 뜻합니다. 고대의 무장한 군인을 생각하면 오른손의 공격용 무기와 왼손의 방어용 방패를 떠올릴 수 있고, 실제로 이 구절을 공격과 방어의 무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문이 두 손에 든 구체적인 무기의 종류까지 밝히지는 않습니다. 이 이미지는 10:3–5에서 다시 구체화되는데, 거기서 바울은 자신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싸우지 않으며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도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지닌 사람
8절부터 바울의 문장은 독특한 리듬을 갖습니다.
영광을 얻든 모욕을 받든, 나쁜 평판을 듣든 좋은 평판을 듣든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취급을 받지만 진실합니다.고린도후서 6:8 · 두루새김
바울은 서로 반대되는 평가와 현실을 한 사람 안에 겹쳐 놓습니다. 그런데 「속이는 사람 취급을 받지만 진실합니다」에 이르면, 좋은 평가와 나쁜 평가를 모두 받는다는 이야기를 넘어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과 실제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속이는 사람 취급을 받지만 진실하다
이 표현은 앞의 4:2와 연결됩니다.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속임수로 다루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 진실을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의 약함을 무능력으로 판단할 수도 있고, 그의 사역을 거짓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지만, 그 평가를 자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최종 기준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전체에 나타나는 갈등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 직분을 변호하면서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구별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 같지만 잘 알려진 사람
알려지지 않은 사람 같지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 같지만, 보십시오,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사람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고린도후서 6:9 · 두루새김
누가 바울을 알고 있는지는 직접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알려져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고린도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신앙 공동체에 알려져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세상의 인정이나 평판이 바울이 누구인지를 온전히 결정하지 못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죽어 가는 사람 같지만, 보십시오,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에서 바울은 「보십시오」라는 말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의 눈앞에 내놓는 듯합니다. 그는 실제로 죽음의 위협을 겪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으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모든 신실한 사역자가 죽음의 위험에서 반드시 구출된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관심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계속하게 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벌을 받는 사람 같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라는 표현도 비슷한 긴장을 지닙니다. 벌을 받는다는 말이 하나님께 받는 훈련을 가리키는지, 사람들에게 당하는 형벌을 가리키는지는 문맥상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벌을 받는 듯한 고난이 곧 최종적인 파멸을 뜻하지 않는다는 대조는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겪는 고난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 고난이 자신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슬픔과 기쁨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슬픔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기뻐하고, 가난하면서도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며,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6:10 · 두루새김
바울은 슬픔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눈물을 흘렸고, 동역자를 기다리며 마음의 안식을 얻지 못했으며,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언제나 기뻐한다고도 말합니다. 이 문장을 슬픔이 신앙 부족의 증거이므로 기쁨으로 덮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다면 바울 자신의 경험과 어긋납니다.
그의 기쁨은 상황이 언제나 좋다는 판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사람들을 자신과 화해시키셨다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고난을 겪는 현실에서 슬픔이 일어나는 동시에, 그 고난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는가
바울의 가난은 단순히 겸손을 드러내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많은 것을 소유하지 못했고,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 일하거나 다른 공동체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고린도전서 4:11–12, 고린도후서 11:7–9). 그런데도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한다는 것은, 그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과의 화해와 새 창조로 초대하여 만들어 내는 생명의 풍요를 가리킵니다.
마지막에는 더욱 급격한 대조가 등장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고린도전서 3:21–23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거기서 바울은 모든 것이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것이며, 그들은 예수님께 속하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속하신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소유는 물질적인 부를 모두 확보했다는 선언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물질적인 필요를 무시해도 된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가난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 가난 속에서도 예수님의 풍요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목록이 향하는 곳
4절부터 10절까지 바울은 계속 자신의 사역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고난을 전시하여 동정을 얻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난 속에서도 고린도 사람들을 위해 살아온 자신의 사역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제 길었던 목록이 끝나자, 바울은 갑자기 그들을 직접 부릅니다.
고린도 사람 여러분, 우리는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
고린도 사람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했고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고린도후서 6:11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앞의 고난 목록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지닙니다. 지명을 사용하여 직접 부르는 표현은 편지 속에서 특별한 호소의 효과를 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사역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만이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과 다시 마음을 나누는 일입니다.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어지다
11절의 원문에서는 입이 열렸다는 이미지와 마음이 넓어졌다는 이미지가 나란히 놓이고, 두루새김은 이를 「숨김없이 말했고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로 옮겼습니다. 숨김없이 말했다는 것은 생각을 숨기지 않고 말한다는 뜻이고, 마음을 활짝 열었다는 것은 그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두 표현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마음을 열었기 때문에 말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과 관계가 어려워졌음에도 그들을 향한 마음을 닫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우리 마음이 좁아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여러분의 마음이 좁아진 것입니다.고린도후서 6:12 · 두루새김
12절에서 「여러분의 마음」(σπλάγχνον)으로 옮긴 원문 표현은 원래 내장이나 몸속의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비유적으로는 깊은 감정과 애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애정과 마음이 좁아져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었는데, 그들 쪽에서 관계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입장을 말한 것이지, 모든 고린도 사람의 실제 심리 상태가 객관적으로 입증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편지의 목적은 그들이 이 관계를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고린도인들이 갚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 자녀에게 하듯 말합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으로 응답하여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고린도후서 6:13 · 두루새김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을 자신을 평가하는 심사위원으로 대하지 않고, 자녀에게 말하듯 권합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4:14–15에서 그들을 사랑하는 자녀라고 부르고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다고 말한 것과 연결됩니다.
그는 자신이 고생했으니 물질적인 보상을 해야 한다거나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원문에서 실제 명령형 동사는 마음을 넓히라는 말 하나이고, ‘같은 보답으로’라는 표현은 그 명령이 어떤 응답인지를 설명하므로, 두루새김은 이를 「같은 마음으로 응답하여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로 풀어 옮겼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응답하는 것은 계산된 대가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응답하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바라는 관계
이 대목에 이르면 앞의 고난 목록이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굶주렸다는 사실을 나열한 뒤에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희생을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할 공간을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6:11–13은 고난 목록에 붙은 감상적인 결말이 아니라, 그 목록의 목적을 드러냅니다. 그의 사역은 사람들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그 은혜 안에서 서로 마음을 열도록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장의 흐름은 갑자기 바뀝니다.
마음을 활짝 열라고 말하던 바울이 이제 서로 맞지 않는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마음은 넓히되, 어긋난 멍에는 메지 말라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서로 맞지 않는 멍에를 함께 메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과 악한 일이 어떻게 한데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빛과 어둠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고린도후서 6:14 · 두루새김
이 구절은 고린도후서에서 가장 많은 오해를 낳기 쉬운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친구가 되는 일에 관해 여러 적용이 이루어져 왔지만, 그 적용을 판단하기 전에 바울이 실제로 어떤 그림을 사용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긋난 멍에의 그림
「서로 맞지 않는 멍에를 함께 메다」는 서로 다른 종류의 존재들이 한 멍에에 묶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명기 22:10에는 소와 나귀를 함께 묶어 밭을 갈지 말라는 규정이 나옵니다. 바울은 그 그림을 인간관계에 적용합니다.
멍에는 두 존재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함께 묶여 같은 방향으로 짐을 지고 움직이는 관계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바울의 경고는 단순한 만남이나 접촉 자체보다, 함께할 수 없는 충성의 대상이나 삶의 방향을 공유하려는 관계와 연결됩니다.
다섯 개의 질문이 하나의 결론으로 향한다
14–16절에서 바울은 질문을 연달아 던집니다.
의로운 일과 악한 일이 어떻게 한데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빛과 어둠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벨리아르와 어떻게 뜻을 같이하시겠습니까?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무슨 몫을 함께 나누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이 우상과 어떻게 뜻을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질문은 다섯이지만 결론은 하나입니다.
서로 함께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질서와 한편이 될 수 있습니까?
이 대조를 모든 믿지 않는 사람이 본래부터 악한 일과 어둠 그 자체라는 뜻으로 지나치게 넓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충성과 소속을 날카롭게 대조하지만, 이 대조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아무런 선함도 있을 수 없다는 인간에 관한 주장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가 무엇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다루는 권면입니다.
벨리아르는 누구인가
15절에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는 이름 「벨리아르」가 나옵니다. 히브리어 벨리야알은 본래 무가치함이나 악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구약성경에서는 악한 사람이나 파괴적인 행동과 관련됩니다. 제2성전기 유대교 문헌에서는 이 말이 악한 세력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발전하며, 특히 사해 문서에서는 어둠의 세력과 연결되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벨리아르의 대조는 선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비교하는 것 이상으로, 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그분을 거스르는 악한 세력 사이의 대립을 나타냅니다. 둘이 동등한 두 권세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그분을 거스르는 세력과 뜻을 같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의 마지막에는 우상이 등장합니다.
우상숭배와 공동체의 충성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바울은 우상에게 바친 음식과 우상숭배에 관한 문제를 길게 다루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종교적 제사와 사회적인 식사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신을 섬기는 신전에서 이루어지는 식사에 참여하는 일은 그 제사에 참여하는 의미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4에서 우상숭배를 피하라고 권하고, 10:20–21에서는 예수님의 잔과 귀신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없으며 예수님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함께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우상과 어떻게 뜻을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우상숭배를 동시에 충성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바울이 믿지 않는 사람과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명령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5:9–10에서 바울은 세상의 죄인들과 모든 접촉을 끊으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7:12–16에서는 믿지 않는 배우자가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버리지 말라고 권하고, 10:27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이 식사에 초대하면 가서 먹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고린도후서 6:14를 믿지 않는 사람과의 모든 우정, 결혼 생활, 직업적 협력, 일상적 접촉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말씀으로 해석하면 바울의 다른 분명한 가르침과 충돌합니다. 핵심적인 배경은 우상숭배에 참여하게 하거나 예수님께 대한 충성을 타협하도록 만드는 관계로 보입니다.
다만 이 구절이 특정한 우상 제사만을 가리키는지, 더 넓게 함께할 수 없는 충성과 결속을 금지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읽을 수 있지만, 고린도 교회에 영향을 미치던 바울의 반대자들을 특별히 가리킨다고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확정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섯 질문이 향하는 중심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 속한 공동체는 자신의 충성을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다른 대상에게 넘겨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다음 문장에서 그 가장 중요한 이유를 밝힙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바울은 다섯 질문에서 똑같은 단어를 반복하지 않고, 어울림, 함께 나눔, 조화, 몫, 뜻을 함께함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한데 어울릴」, 「함께할」, 「뜻을 같이하시겠습니까」, 「몫을 함께 나누겠습니까」, 「뜻을 같이할」로 옮겼습니다. 모두 관계와 참여를 나타내지만, 어떤 것은 함께 몫을 가지는 관계를, 어떤 것은 공동의 참여를, 어떤 것은 서로 뜻을 맞추는 관계를 강조합니다. 바울은 하나의 질문을 여러 방향에서 반복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어디인가
하나님의 성전이 우상과 어떻게 뜻을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 안에 살고 그들 가운데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고린도후서 6:16 · 두루새김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 표현은 고린도전서 3:16–17에서 이미 등장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영이 그들 안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6:16의 성전은 믿는 사람 한 명의 몸보다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 전체를 가리킨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다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과 예배, 언약의 관계를 드러내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특정한 건물로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는 뒤이어 나오는 구약 인용 「내가 그들 안에 살고 그들 가운데 다닐 것이다」에서 드러납니다.
이 말씀은 레위기 26:11–12와 에스겔 37:27 등에서 반복되는 언약의 약속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레위기 2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자신이 머무실 곳을 두시고 그들 가운데 다니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의 약속입니다.
에스겔 37장에서는 그 약속이 심판과 유배를 겪은 백성의 회복을 바라보는 말씀 속에 다시 등장합니다. 흩어진 백성이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맺으시며, 자신이 머무실 곳을 그들 가운데 두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두 본문 사이에는 긴 역사적 간격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 가운데 사시겠다는 같은 중심을 지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다니신다
「그들 가운데 다닐 것이다」는 하나님께서 멀리서 백성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그림입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는 단순한 종교적 금지 목록이 아닙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우상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별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먼저 스스로 완전해져야 한다는 사람의 독립적인 노력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들 가운데 사신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구별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도록 만들기 위한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
바울은 하나님을 특별히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우상과 대조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형상이며, 그 자체로 생명을 지닌 하나님이 아닙니다. 반면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부르시고, 그들 가운데 사시며, 그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이 차이는 어느 종교의 형상이 더 뛰어난가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시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인가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그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들 가운데서 나오라는 말씀은 어디에서 왔는가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 나와 따로 서라. 더러운 것에 손대지 마라. 내가 너희를 받아들이겠다.」고린도후서 6:17 · 두루새김
이 말씀의 주요 배경은 이사야 52:11입니다.
바벨론에서 나오는 백성
이사야 52장은 시온의 회복과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52:11에서는 백성에게 바벨론에서 떠나라고 명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기구를 메는 사람들에게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말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외국인과 접촉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라, 유배와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돌아오는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고린도 공동체에 적용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 아니지만,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우상숭배의 질서에서 떠나야 합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문장을 완전히 그대로 옮기지 않고, 따로 서고 깨끗하게 살라는 명령에 하나님의 받아들이심에 관한 약속을 이어 붙입니다.
나오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이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신다
17절의 마지막 문장 「내가 너희를 받아들이겠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아들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들 가운데서 나오고 더러운 것에 손대지 말라는 명령은 홀로 서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구별은 무엇을 잃는 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는 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6장 첫머리와도 연결됩니다. 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 주시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선언했고, 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너희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단지 세상의 어떤 관계를 끊는 일이 아니라, 자신들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께 온전히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약속
모든 능력을 지니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과 딸이 될 것이다.」고린도후서 6:18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사무엘하 7:14의 다윗 왕조에 대한 약속과 연결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다윗의 뒤를 이을 후손에 대해 자신이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자신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의 본래 대상은 다윗의 왕조를 잇는 왕이지만, 6:18에서는 그 약속이 공동체 전체로 확대됩니다.
다윗의 왕에게 주어졌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 이제 예수님께 속한 공동체 전체에 적용됩니다. 물론 이들이 다윗 왕과 동일한 왕권을 가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정체성을 가족의 관계로 설명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4–7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이 아들의 신분을 받게 하셨고, 그들의 마음에 아들의 영을 보내셨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가 이 새로운 관계의 근거입니다.
전능하신 주님의 약속
이 장의 마지막에는 「모든 능력을 지니신 주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합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을 가리키는 이 호칭은 칠십인역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다스리심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에 자주 등장합니다. 바울은 이 호칭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받아들이시고 아들과 딸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의 끝에 놓습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에서 「딸」까지 분명히 말하는 표현은 이사야 43:6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들과 딸들을 모으시는 회복의 약속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인용에는 다윗 왕조의 아들이 되는 관계와 흩어진 백성의 회복이라는 두 전통이 겹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의 구약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문장은 아닙니다.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바울이 마음을 활짝 열라고 권한 고린도 사람들에게, 장의 마지막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들과 딸이라는 이름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서 바울은 서로 맞지 않는 멍에를 메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두 단락이 너무 갑작스럽게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까?
6:14–7:1이 원래 이 자리에 있었는지는 논쟁이 있습니다. 이 단락을 빼면 6:13의 호소와 7:2의 「마음에 받아 달라」는 요청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벨리아르, 서로 맞지 않는 멍에 같은 독특한 표현이 모여 있어서, 다른 편지에서 옮겨졌거나 후대 편집 과정에서 끼워 넣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반면 이 단락이 바울 자신에게서 나왔으며 현재의 흐름에서 공동체의 정체성을 설명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대목을 빼고 전하는 사본은 확인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 원래 저자와 편집 역사를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흐름에서 읽으면 두 명령은 반드시 모순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라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과 그 복음을 전하는 섬김을 받아들이라는 권면이고,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정체성을 버리고 다른 충성의 대상에 매이는 일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두 요청의 대상과 방향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은혜와 화해의 말씀에는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우상숭배와는 뜻을 같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적용할 때 믿지 않는 사람과 관계를 맺었는지 여부만 따지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관계가 예수님께 대한 충성을 타협하게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함께하도록 묶는지, 아니면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정직하게 협력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인지 살펴야 합니다.
무엇보다 본문이 가르치는 구별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고 선언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은 자신의 자격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구별은 자랑의 근거가 아니라, 자신을 받아들이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을 세상에서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분명히 알게 합니다. 마음을 활짝 여는 일과 거룩하게 구별되는 일은 여기서 한 가지 근거를 갖습니다.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굶주리며 나쁜 평판을 들었지만, 그 모든 경험을 이야기한 뒤에 자신을 위해 어떤 보상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을 자녀에게 말하듯 부르며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과 딸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바울의 호소보다 더 깊은 관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이름 안에서 그들은 무엇에 마음을 열고 무엇에서 떠나야 하는지를 다시 배우게 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